본문듣기

민족운동의 요람 상동교회목사 전덕기

[겨레의 인물 100선 75] 전덕기

등록 2024.02.02 08:30수정 2024.02.02 08:30
0
원고료로 응원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a 상동교회(남대문 시장 근처) 양반과 외국인이 살던 정동을 떠나 스크랜턴 선교사는 민중목회를 지향하면서 남대문 시장 근처에 상동병원과 상동교회를 건립했다. 상동교회는 1900년대 항일구국운동의 요람이자 중심체였다

상동교회(남대문 시장 근처) 양반과 외국인이 살던 정동을 떠나 스크랜턴 선교사는 민중목회를 지향하면서 남대문 시장 근처에 상동병원과 상동교회를 건립했다. 상동교회는 1900년대 항일구국운동의 요람이자 중심체였다 ⓒ 하성환

 
한말 국권침탈기 민족운동의 요람이라면 서울 남대문안 상동거리에 있는 상동교회와 주임목사 전덕기(全德基, 1875~1914)일 것이다. 안창호·양기탁·이동휘·신채호·이회영·이상설·김구 등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 신민회가 이곳에서 조직되고, 헤이그특사 파견도 여기서 싹이 텄다.

전덕기는 아버지 전한규와 어머니 임씨 사이에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불운하여 9살 때 부모가 모두 별세하여 고아가 되었고, 숯 장사를 하는 숙부 집에 들어가 성장하였다. 숙부의 직업으로 보아 하층 계급의 출신으로 추정된다.

17살 되는 1892년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스크랜턴을 찾아갔다. 신앙적인 것이 아니라 생계의 목적으로 선교사가 되고자 해서였다. 준수한 용모와 성실해 보이는 태도에 그는 자기집 고용인으로 채용하였다. 이것이 그의 생애를 가름하는 계기가 되었다. 4년 후 그는 스크랜턴의 신임을 받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896년 22살 때이다.

전덕기는 1898년 상동교회 속장이 되어 평신도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때 교회 안에 엡윗청년회를 조직, 민주적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독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899년에는 교회 안에 설립된 공옥(功玉) 학교 교장이 되어 주로 불우한 형편에 있던 청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1년 평신도로서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권사직을 받았고 1902년에는 미감리교회 조선연회에서 전도사로 임명받아 목회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3년 엡윗청년회가 정치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선교사에 의해 해산당하자 교회 안에 청년학원을 설립, 보다 적극적인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같은 민족주의 사상을 지닌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1905년의 을사조약 무효상소운동이나 1907년의 헤이그밀사사건은 상동청년학원 내지는 '상동파'(商洞派)로 불리는 민족주의자들의 항일운동이었다.(이덕주, <권덕기>, <한국감리교회를 만든 사람들>)

그는 열심히 배우고 노력하여 1907년 스크랜턴의 후임으로 상동교회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 무렵 안창호가 미국에서 귀국하면서 비밀결사 신민회를 상동교회에서 조직하였다. 국권회복과 공화제 국민국가 수립을 궁극 목적으로 삼고, 국민계몽·인재양성·경제적 실력양성을 추구하는 한편 해외의 독립군 기지 건설·무관학교 설립 등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기관지로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하고 정주에 오산학교, 평양에 대성학교를 비롯 각지에 학교를 세웠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병탄과 동시에 신민회 멤버를 '데라우찌 암살음모사건'을 날조하여 구속해 혹독한 고문을 가하고 이를 해체시켰다. 전덕기도 구속되어 심한 고문으로 병을 얻어 불기소로 풀려났으나 후유증으로 목회 활동에 큰 지장이 되었다.
a  민중목회를 실천한 선한 목자이자 을사늑약 반대 운동, 상동청년학원을 통한 교육구국운동, 헤이그 특사 파견, 신민회 창립 등 1900년대 항일민족운동의 위대한 거목이었다

민중목회를 실천한 선한 목자이자 을사늑약 반대 운동, 상동청년학원을 통한 교육구국운동, 헤이그 특사 파견, 신민회 창립 등 1900년대 항일민족운동의 위대한 거목이었다 ⓒ 하성환

 


그는 기독교 목사로서뿐 아니라 사회의 목탁이었다. 많은 인재를 키웠고 시대의 진로를 제시하였다.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뒷날 변절했지만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의 증언이다.

순 기독교 신자 인물로는 전덕기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당시 상동교회 목사로서 열렬한 신앙가요 동시에 애국자였습니다. 나에게는 그의 감화가 제일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동교회 뒷방에는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이회영·이상설·이준 등 지사들이 수시로 모여와 국사를 묘책했는데 나는 그들만큼 많이는 아니나 그 패에 끼인 일이 있습니다. 진실로 상동교회 뒷방은 이준 열사의 헤이그밀사 사건의 온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전택부, <한국기독교청년회운동사>)


전덕기는 국난기에 누구 못지않게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민중들과 함께하였다.

전덕기는 교회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바깥을 향해 들어오라고 손짓만 하는 그런 목회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먼저 바깥 민중들을 향해 나갔다. 길에서 민중을 만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의 삶을 목격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현장인 길이 그의 목회 현장이었다.

특히 가난한 백성, 질병으로 고생하는 민중이 그의 주된 목회대상이었다. 평소 동료나 후배 목회자들에게, 목회가 항상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장례를 위한 나막신, 마른 쑥, 의지(意志)를 갖추고 있으라고 권면한 것도 평소 부패한 시체를 많이 다루어 본 목회자의 생활체험에서 나온 교훈으로 풀이될 수 있다.(이덕주, 앞의 책)

그는 신민회 사건으로 당한 고문 후유증이 악화되어 1914년 1월부터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듬해 3월 23일 39살의 한창 나이 숨을 거두었다. 100년의 장수인보다 보람 있는 기독교인의 짧은 생애였다.

전덕기는 평범한 목회인이면서 또한 비범한 민족운동가였다 그것은 민중목회를 통해 확인한 이 땅의 민족현실을 묵과하지 않고 그 치유와 계도(啓導)에 헌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민족운동가적 활동은 민중목회를 통한 신앙체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는 민족정신을 계몽하고 교육하는 일을 자기 목회의 한 부분으로 삼았다.(앞과 같음)
 
#겨레의인물100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