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의사 사당 내의 녹천 고광순 영정
녹천기념사업회
지난 기사
'400년을 이어온 의향 호남의 뿌리'에서 이어집니다.
한말 고광순 의병장의 삶
녹천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나라를 구한 의병장 제봉 고경명(高敬命)의 둘째 아들인 학봉(鶴峰) 의열공(毅烈公) 고인후(高因厚)의 12대 손이다.
그는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생들은 위정척사의 기치를 높이 들고 과감하게 항일 의병투쟁의 길에 나서게 됐다. 제천 의병장 류인석(柳麟錫)의 격문이 도화선이 돼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서는 가운데, 호남에서는 장성의 기우만(奇宇萬)과 기삼연(奇參衍), 창평의 고광순과 나주의 이학상(李鶴相) 등이 1896년 2월 그믐날 광산부 광산관(광주향교)에 집결했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장성을 거쳐 정읍까지 진격하였을 때, 조정으로부터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이 고종의 해산 칙령을 가지고 와서 해산을 명하자, 황제의 영을 거역할 수 없다 하여 순순히 파병(罷兵; 군사를 흩음) 결정을 내리고 거의(擧義)의 뜻이 꺾이고 말았다. 의병 해산 뒤 고광순은 비분강개해 국치(國恥)를 씻고자 다시 의병을 일으킬 생각만 했다. 그는 숨어 다니면서 영호남으로 출몰해 백성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혹은 눈물로 호소하면서 동지를 규합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이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광순은 고제량과 함께 면암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면암은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다시 고제량과 함께 기우만과 백낙구(白樂九)를 찾아가 거사할 것을 모의하고 의병을 모우고자 떠난 사이에 일이 발설되어 기우만과 백낙구가 그만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래도 고광순은 좌절되지 않고 동지 규합에 힘썼다.
12월 11일(양 1907년 1월 24일) 고광순은 고제량과 더불어 창평 저산에서 창의의 깃발을 세웠다. 고광순 의병부대는 유격전술을 써서 조석으로 변장하고, 어제 동쪽을 쳤다면 오늘은 서쪽을 치고, 밤낮으로 진지를 바꾸는가 하면, 구름과 같이 모였다 흩어지며, 치고 빠지기를 번개같이 하는 바람에 일군들은 이러한 유격전에 시달리고 지친 끝에 아예 고광순 부대의 뿌리를 뽑아버릴 요량으로 녹천 본가에 불을 질러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