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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세-92세 두 형제의 맞절

아버지와 숙부의 특별한 만남... 가족의 의미 되새긴 설 연휴 풍경

등록 2024.02.11 17:59수정 2024.02.12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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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절하는 아버지와 숙부님(오른쪽), 두 분 모두 보청기를 한 것이 보인다. ⓒ 이혁진

 
지난 9일 설 연휴 첫날 숙부님이 사촌동생을 앞세우고 예고 없이 집을 방문했다. 명절이면 큰집인 우리 집에서 차례를 지내지만 이번 설은 내가 병중이라 쇠지 않기로 미리 말씀드렸는데 오신 것이다.
     
아버지는 예고 없는 방문에 동생을 보자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둘은 꺼부정한 자세로 맞절을 시작했다. 코로나 이후 오랜만에 보는 두 분만의 세배다.  
    
숙부님의 예고 없는 방문
    
아버지는 "올 설은 쇠지 않는데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다. 숙부 대답은 간단했다. 


"그냥 설을 넘기기 그래서 형님 얼굴 보려고 왔어요."
   
우리 나이로 아버지는 95세, 숙부님은 92세. 아버지와 달리 지팡이를 쓰지 않는 숙부는 지팡이에 의지해야만 하는 형의 안위를 늘 걱정한다.
     
숙부는 "엊그제 생전 꿈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금방 가셔서 얼마나 아쉽고 섭섭한지 모르겠다"면서 "꿈꾼 후 무슨 변고가 있을까 종일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잘 지나갔다"고 꿈 얘기를 풀었다. 

두 분의 대화는 사소해도 내게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두 분이 약속한 듯 "우리는 이젠 죽어도 감사해야 할 나이"라는 평소 하지 않는 말씀을 해 마음에 걸렸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뜨거운 형제애를 느낀다. 경외감마저 들기도 한다. 6.25 전쟁이 터지자 참전한 두 분은 이때 고향을 등져야 했다.
     
미수복 개풍군이 고향인 두 분은 고향에 부모와 형제 모두를 두고 내려와 서로 헤어져 이산가족으로 살았다. 외롭고 서러운 실향민의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버지와 숙부, 두 형제는 6남매의 첫째와 둘째로 타향에서 75년 동안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다. 만나면 수시로 고향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과 추억을 빠트리지 않는 이유이다.
     
두 분은 전후 한때 연락이 끊겼다. 실향민 대부분 그렇듯 먹고사는 생업에 바빴기 때문이다. 호구지책에 형제를 찾거나 주변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결혼해 낳은 자식들이 할아버지나 삼촌 등 가족의 소재와 정체성을 묻기 시작할 즈음 두 분은 다시 만났다. 전후 내가 젖먹이 때 숙부님을 보고 처음 만난 건 중학교에 진학하고서다.
     
1960년대 중반 내가 중학생이 됐다며 숙부가 남대문 시장에서 청바지를 사주신 것은 지금도 생생하다. 청바지는 당시 대학생도 입지 못한 귀한 옷인데 나로선 과분한 대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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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숙부님(오른쪽)이 1993년 금강산 관광에 나선 모습 ⓒ 이혁진

 
숙부님은 집안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상의하는 내가 가장 존경하고 의지하는 분이다. 숙부님 또한 조카인 나를 무척이나 아끼고 내 아내에게도 각별하다.
      
아버지와 함께 숙부님을 오래도록 가까이 모셔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해 죄지은 심정이다. 내가 병을 얻은 이후에는 연락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맞절하는 아버지와 숙부님 보며 가족의 소중함 느껴 
    
아버지와 숙부 두 분 모두 보청기를 껴도 원만한 소통이 어렵다. 중간에서 내가 말을 거들거나 도와야 대화가 가능하다. 몇 년 전 인공와우수술을 한 숙부는 이제 전화통화도 불가능하다.
     
두 어르신이 계시지 않으면 집안에서 내가 연장자가 되는데 나 혼자 살아갈 길이 막막하고 두려울 것만 같다.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두 분의 존재는 귀하다.
     
숙부는 2008년 서울 집을 정리하고 경기도 광주로 이사했다. 자녀들도 성장하고 부부만의 노후를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숙모님이 치매에 걸리고 말았다.
      
우리 인생이 앞일을 예상할 수 없다지만 숙모님이 그렇게 된 후 숙부님의 삶은 뒤죽박죽이 됐다. 숙부님에게 갑작스레 닥친 처지는 언제나 안타깝다.

숙부님은 숙모를 아기처럼 평생 돌보야 하는 운명을 처음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돌봄의 고통과 번민을 잠시 잊으려고 근처 노인복지관 서예반을 찾았는데 이게 숙부의 유일한 취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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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아버지와 숙부님(오른쪽)이 오찬하는 모습 ⓒ 이혁진

 
가만 생각해 보니 설에 살아 있을 때 유일한 형님을 한번이라도 더 보고 고향을 그리는 숙부의 깊은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내가 아프다는 핑계로 설 쇠지 않은 것이 도리어 부끄럽기조차 하다.
     
숙부님 뜻이 백번 옳다. 명절의 의미가 형제나 가족의 만남에 있는데 차례를 지내지 않더라도 형님과 조카를 위로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이번 설에 가진 두 분의 맞절과 세배는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그리고 조카를 사랑하는 숙부의 깊은 마음도 새삼 깨달았다.
     
내 나이도 어느덧 70세, 연로하신 두 분의 형제애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가장의 책임과 역할을 가르쳐주는 것만 같다.
      
두 아버지처럼 나와 4촌 동생 우리도 맞절을 하며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했다. 지나칠 뻔한 가족의 소중한 의미를 다시금 되새겼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게재할 계획입니다.
#숙부님 #아버지 #작은아버지 #맞절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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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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