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나뭇가지 사이로 쓰레기가 숨어있다.
이준수
어디선가 날아온 비닐봉지와 사탕껍질을 주으며 산길을 오르자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휘이잇! 휘이잇!" 하는 동고비 울음소리였다. 최근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서도 동고비를 관찰하고 소리를 녹음했었기에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동고비는 특이하게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소리를 낼 수 있다. 대표적인 소리가 "휘이잇! 휘이잇!"이다. 문자로는 고유의 음색과 청량함을 제대로 전달하기 힘들다. 딱 들으면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 좋은 소리다.
몸 윗면이 청회색으로 덮인 귀여운 동고비는 나무 타기의 명수다. 크기는 박새만 해서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동고비는 나무 기둥을 위아래로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는 것은 기본이고 굵은 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움직이기도 한다. 발톱에 초강력 찍찍이라도 달려있는 걸까. 통통거리듯 나무 표면을 뫼비우스 띠처럼 내달린다. 동고비는 사람을 별로 겁내지 않는 듯 경계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동고비를 보기 위해서라도 플로깅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에 쓰레기 줍기를 게을리했더니 덤불 곳곳에 쓰레기가 눈에 띄었다. 비타민 껍질, 광고지, 테이크 아웃 컵이 수시로 등장했다. 버려진 채 꽤 방치되었는지 햇빛에 외관이 바래있었다. 전단지는 집게로 들어 올리자 작은 조각들로 분해되어 떨어졌다. 할 수 없이 손으로 재차 주웠다. 플로깅 할 때는 집게뿐 아니라 목장갑을 준비하면 편하다.
최근 운동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아서 그런지 사오십 분 남짓한 플로깅 시간 동안 제법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우리 부부를 향해 시청에서 나왔냐고 묻는 분도 있고, 감사하게도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시는 분도 있었다. 대부분 조용히 지나가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시비를 걸거나 훼방을 놓는 사람은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때때로 플로깅을 하다 보면 불쾌한 일을 당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쓰레기봉투에 개인 쓰레기를 한 움큼 버리고 가기도 한다. 어차피 길에 버렸다면 쓰레기일 것인데, 우리 수고를 미리 덜어주는 건가? 상상과는 달리 막상 현실에서 이런 '쓰레기 빌런'을 만나면 당황스러워서 뭐라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게 된다. 세상에는 산책로에 버려진 각양각색의 쓰레기만큼이나 다양한 개성과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플로깅에서 발견한 놀라운 쓰레기는 개똥 봉지였다. 개똥을 치우는 것은 반려견 산책인의 기본 에티켓이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분들은 배변 봉투를 지참해서 알아서 깔끔하게 뒷정리를 하신다. 똥이 담긴 봉투를 꼼꼼하게 묶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흐뭇한 감정마저 든다. 그렇지만 경악스럽게도 개똥이 든 봉투를 엉뚱한 곳에 무단 투기한 현장을 종종 발견한다.
도대체 어떤 심리일까. 혹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반려견 배변 처리를 잘하는 선진 시민이었다가, 주변의 눈이 사라지면 덜렁거리는 봉투를 휙 던져버리는 것일까. 알지 못하는 특수한 사정이 발생해 부지부식 간에 배변 봉투를 떨어뜨렸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개똥 봉투를 주워 담았다. 모든 쓰레기에 시비를 걸기 시작하면 스트레스 받아서 플로깅을 지속할 수 없다.
좋은 의도였을 거라고 상상하기
플로깅을 할 때 정신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태도는 'AGI'이다. 'Assume Good Intension'을 약간 비틀어 조합한 약자로, 좋은 의도였음에도 일이 그렇게 되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령 길에 휴지뭉치가 흉측하게 뭉쳐져 있다고 하자. 가장 안 좋은 방법은 저주다. '누가 자기 코 푼 휴지도 못 챙겨? 콧구멍에 다시 넣어주고 싶네.' 이런 저주를 내리면 나의 하루만 망친다. 대신 '좋은 의도라고 생각하기', AGI를 가동한다.
갑자기 강풍이 불어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가 코를 풀다가 휴지가 바람에 날아가버렸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라 휴지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쓰레기로 남게 되었다고 믿어야 한다. 그래야 가벼운 심정으로 집게질을 할 수 있다. 이제야 휴지 주인의 찜찜한 마음이 풀어지게 되겠구나, 하고 덕담도 좀 해주면서 말이다. 처음에는 잘 안 되지만 기계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