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 유족들이 개토식 매장지를 향해 제례 모습 / 오른쪽 : 오른쪽에서 두 번째 MBC 이준석 기자, 네 번째 장상환 교수, 다섯 번째 성연석 전 도의원. 그 외는 유족임
김영희
봉강마을 사람들의 목격과 증언이 정확하지 않다. 몇 구가 드러날지 궁금하고 긴장되는 순간이 시작됐다. 며칠은 포크레인 작업을 해야 하니까 며칠 후 오라고 했다.
며칠 후 발굴장에 도착하니 필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고 한탄만 나온다. 그동안 다닌 발굴지 중에서 가장 정확하고 훼손도 덜 됐다. 개체수가 거의 육안으로 드러났다. 학살 과정을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나란히 드러나 있었다. 유해는 72년의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가해자들의 사살 과정과 사살 행위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폭 1m 50cm, 깊이 1m, 길이 15m 긴 구덩이에 41명이 나란히 엎드린 상태였다. 가해자는 발 방향에서 일렬로 서서 머리를 향해 격발해 학살한 것으로 확인됐다. 죽지 않았으면 권총으로 확인 사살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한 트럭 40~50명 정도 예측이 맞다. 권총 탄피와 칼빈 탄피로 보아 학살자들은 군인과 경찰로 추정된다. 탄피가 100여 개 이상이 나왔다는 것은 한 사람당 2발 이상을 쏘았다는 뜻이다.
이름 모를 1번-2번 유해와 만나다
발굴장에는 규율이 있어 아무 곳에서나 발굴할 수 없다. 발굴단장이 지시한 곳aks 발굴을 할 수 있다. 김헌 원장이 필자에게 북쪽 위쪽에 있는 유해 1번, 2번(발굴장에서 정해지는 번호) 두 분을 발굴하라고 지시한다.
발굴 도구를 준비해 흙에 앉으면서 "안녕하세요. 저와 만나게 돼 반갑습니다. 어서 어둠에서 밝은 곳으로,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어 드릴개요"라고 인사하고 발굴 시작한다.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두개골은 형태가 잘 드러나고 한 분은 총상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신체도 건장하고 장신이었고 치아 금니가 노출됐으며 한 분은 가슴뼈도 남아 있었다. 사실 가슴뼈와 좌골과 골반은 약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경우가 드문데 41구 중에서 유일하게 노출됐다. 목 부위를 계속 흙을 파니까 하얀 치아 와 금니가 살며시 보인다.
이후 검은 선이 살며시 드러났다. 계속 따라서 흙을 파니 기다란 전선이 확인된다. 손목과 손목을 결박한 상태는 2인 1조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수법인데 진주지역 발굴장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