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에서 산 도시, 마당 있는 시골... 삶은 이윤보다 중요하다

시골 정원생활자의 소소한 봄맞이, 봄의 왈츠에 맞춰 느린 스텝을 밟아 본다

등록 2024.02.16 17:47수정 2024.02.16 17:4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친절한 날씨다. 눈비 온 뒤 누런 잔디마당을 햇살이 포근히 덮었다. 따스한 햇볕은 내 손에 살포시 갈퀴를 쥐어 준다. 이처럼 부드러운 권유를 어떻게 마다할 수 있겠는가? 검불을 긁는다. 지난 가지치기에 떨어진 잔가지도 모은다. 잔디를 긁어 생장을 자극하고 곳곳에 낀 이끼도 떼어낸다. 움푹 팬 자리엔 모래를 한 움큼 집어 메워준다. 손길을 따라서 풋풋한 봄이 그려진다.


잔디마당 곳곳에 잡초가 불쑥불쑥 솟아 있다. 겨우내 이처럼 푸른 모습이라니 참으로 끈덕진 생명력이다. 솎아내기 힘들 만큼 번져있어 제초제를 뿌리기로 했다. 20리터 분무통을 들처메고 차근차근 잔디밭을 돌다 보니 팔이 저리다. 어깨끈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가까스로 작업을 마친다. 아, 취향을 살리려니 삭신이 고단하다.

옥외 창고를 정리했다. 뭐니 뭐니 해도 봄맞이엔 대청소다. 농기구와 자재가 아무렇게나 던져져 널브러진 채로 겨울을 났다. 용도에 따라 자리를 나누고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을 분류한다. 어지럽던 창고가 정연해지니 기분도 말끔해졌다. 공간의 탄생은 정리의 놀라운 힘이다. 그 와중에 쓸모 있는 물건을 발견하면 공돈이 생긴 듯 반갑다.

지나고 나면 짧은 봄이 아쉽다. 봄의 뒤편은 대자연의 소관이기에 시작을 앞당겨 본다. 복수초 모종을 심었다. 얼음을 뚫고 나와 봄을 부른다는 얼음새꽃. 노란 꽃잎이 봄볕을 닮았다. 이미 수선화와 납매, 매화와 목련 꽃봉오리가 올라왔다. 기후 온난화 때문일까? 작년보다 봄이 오는 속도가 빠르다. 지난 일 년 내내 꼼꼼히 기록해 두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쳤을 변화다.
 
a

봄꽃 싹트는 봄이다. 복수초와 납매가 피었다. ⓒ 김은상

 
꽃씨를 주문했다. 백일홍과 달리아처럼 까다롭지 않은 꽃들을 화분에 키워 대문에서 들어오는 길목에 늘어놓을 계획이다. 다소곳한 날씨에 이끌려 냉장고에 보관해 둔 채소 종자도 꺼냈다. 씨앗을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살짝 설렘이 움튼다. 관심과 기대에 작은 씨앗이 어떻게 응답했는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상토에 한 톨씩 심은 쌈채소 모종판을 선룸으로 들여놓는다.

텃밭엔 늦가을에 심은 양파가 겨울을 잘 버텨냈다. 빈자리와 플랜터박스에 퇴비를 뿌리고 흙을 뒤집었다. 가장 먼저 심을 씨감자도 싹을 틔우기 위해 꺼내놓았다. 봄이라 느끼며 이런저런 일을 며칠간 해왔지만 사실 일을 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기껏해야 오후에 서너 시간 정도. 움직이며 살짝 땀을 내니 몸에 활력이 돋는다. 기쁜 봄마중이다.

한동안 안 보이던 작은 새들이 지저귄다. 아기 울음인 듯 부성을 자극하는 소리에 명랑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리저리 녀석들의 자취를 쫒는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기다림이 깊었나 보다. 예년보다 이른 봄이 반갑다. 이따금 까마귀 울음만 공허하게 날리던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새삼 시골집에서 사는 기쁨이 솟구친다. 도시에선 집이라기보다 방에서 살았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지금은 문을 열고 나서면 마당이 있다. 가까이 산과 숲이 있고, 꽃과 새를 마주할 수 있는 곳에 내 앞날이 있다. 작정하고 멀리 가지 않아도, 잠시 머물다 서둘러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여행이나 도전이 아닌 생활이다. 나이 들어가는 인생의 어느 어귀, 뜨락에 서게 된 것을 감사하며 한 해 동안 정원에서 잘 놀기 위한 마음을 간직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새롭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에 맞추느라 살펴보지 못했던 계절이었다.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이윤보다 중요하다.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있을 거야'와 같은 막연함, 미래에 대한 불안과 욕심이 가라앉는 나이가 됐다. 대신 꽃과 나무처럼 주어진 시간을 시지프처럼 살아내는 통쾌함을 알게 됐다. 그렇게 하루를 살고 한 계절, 한 해를 넘기는 일이 이어지겠지. 봄의 왈츠에 맞춰 느린 스텝을 밟아 본다.
#봄맞이 #새싹 #봄꽃 #마당 #전원생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은퇴한 초보 뜨락생활자. 시골 뜨락에 들어앉아 꽃과 나무를 가꾸며 혼자인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금반지 찾아준 사람이 뽑힐 줄이야, 500분의 1 기적
  2. 2 검찰의 돌변... 특수활동비가 아킬레스건인 이유
  3. 3 '조중동 논리' 읊어대던 민주당 의원들, 왜 반성 안 하나
  4. 4 '윤석열 안방' 무너지나... 박근혜보다 안 좋은 징후
  5. 5 "미국·일본에게 '호구' 된 윤 정부... 3년 진짜 길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