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래의 순정만화 <엄마 찾아 삼만리> 등은 만화시리즈 우표로도 발행될 만큼 인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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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교육관도 바꾼 '몰래 보던 추억'
내 고향은 안동에서도 시골이었기에 김창남이 자란 춘천시내보다 만화가 더 귀했지만 간혹 저런 만화책이 구해지면 보고 또 봐서 줄거리도 기억한다. 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가 장롱 위에 숨겨둔 음란 만화와 소설까지 탐독했다.
그런 경험은 우리 부부가 아이들을 키울 때 TV를 골방으로 보내는 대신 아파트 거실을 도서실로 만들고, 10권짜리 만화책인 이두호의 <객주>와 백성민의 <장길산> 등을 서가에 그대로 꽂아 두는 '무모함'으로 이어졌다.
음란한 장면이 곳곳에 나오지만 어차피 보게 될 '야동'으로 성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보다 상상력 넘치는 만화 그림과 원작자인 김주영·황석영의 명문장을 통해 감성을 키워 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화의 지문과 대사는 명문장 모음집이나 다름없다. 만화책을 본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부터 10권 안팎의 두 대하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하숙생'과 '사랑을 위하여'는 아이에게 어떤 의미?
소년 김창남은 집에서 술판을 벌인 아버지 친구들 앞에서 최희준의 '하숙생'을 부르기도 했다. 국민학교 3, 4학년짜리 아이가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부른 것이다.
"어, 이 놈 봐라. 조그만 놈이 그런 노랜 언제 배웠어. 야, 하나 더 해봐라."
앙코르 곡으로 부른 게 역시 최희준의 '종점'이다.
'너무도 빨리 온 인생의 종점에서, 싸늘하게 싸늘하게 식어만 가는, 아아아 아아 아아아 내 청춘 꺼져가네.'
심각한 표정으로 '한 많은 내 청춘'을 부른 꼬마는 어이없어 하던 어른들한테 용돈을 두둑이 받았다는 후문이다. 그는 강연에서 "'정처없이' '속절없이' 같은 단어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쩐지 심각하게 불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은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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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남의 '하숙생' 한미리스쿨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에서 김창남 교수가 9살 때 부른 최희준의 ‘하숙생’과 ‘종점’을 다시 부르고 있다. ⓒ 최하정
아이들은 부모들이 집이나 차에서 줄곧 틀어 놓는 라디오나 CD로 가요를 듣고 나름대로 가사를 해석하며 대중음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우리 막내아들은 유치원생 시절 차안에서 까불대다가 김종환의 '사랑을 위하여'가 나오면 숨죽이며 기다리다가 한 대목에서 꼭 끼어들었다.
"내가 아플 때보다 네가 아파할 때가 내 가슴을 철들게 했고, 너의 사랑 앞에 나는 옷을 벗었다. 거짓의 옷을 벗어버렸다."
"아, 변태."
아이들은 유치원 친구한테 그런 말도 배워가며 크는 법이고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대목에서 그 말을 써먹고 싶어한다.
'메아리'와 '노찾사'로 맺어진 인연들
어른 김창남은 한미리스쿨 음악회에서도 '하숙생'과 '종점'을 앙코르 곡으로 불렀다. 그는 어린 시절 노래로 칭찬받던 경험이 피그말리온 효과로 이어진 걸까, 서울대에 입학한 뒤 노래패 '메아리'에 가입한다. 당시 미대 출신 김민기가 노래극 제작을 도와 달라고 부탁해 녹음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것이 유명한 '공장의 불빛'이다.
그 경험은 메아리 회원들에게 음악이 사회와 만나는 방식에 대한 사고의 스펙트럼을 극적으로 넓혀 주었다. 이들은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음반을 내게 되고 '노찾사'라는 약칭으로 무대 공연들을 시도했다. '노찾사'는 4집까지 음반을 내는데,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 등은 솔로 가수로도 활동했다.
메아리와 노찾사 활동을 통해 만나 결혼까지 한 이가 김민기의 서울대 미대 후배이기도 한 지금의 부인 조경옥씨다. 그들 부부는 한미리스쿨 음악회에서 '노찾사' 음반에 실린 '광야에서' 등 10여 곡을 열창했다.
'동요는 왜 애잔한 노래만 기억나지?'
나중에는 참석자들과 동요 메들리를 합창했다. '노래 이어 부르기'에서 참석자들이 부른 노래는 '섬집 아기' '나뭇잎배' '반달' '오빠 생각' '엄마야 누나야' 등이었다.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동요의 선율과 노랫말이 하나 같이 애잔한 곡들이어서 신기했다. 대부분 신산한 삶과 모진 세월을 견뎌온 탓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