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아니고 두 번 군생활한 김씨의 사연

한센병 발병 후 도성마을에 정착... 그가 전한 인생사

등록 2024.03.04 11:09수정 2024.03.04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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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애양원 뒷편 한센인 정착촌에 사는 김아무개씨(88)가 보여준 병적증명서. 왼쪽은 자신이 육군에서 전역한 증명서이고, 오른쪽은 형의 이름으로 해병대에서 복무하다 전역한 증명서다. ⓒ 오문수

 
지난 2일 여수 애양원 뒤 도성마을을 방문했다. 2개월 전 애양원을 방문해 취재하다가 우연히 만났던 김아무개씨로부터 자신이 두 번이나 군복무한 사연이 기록된 병적증명서를 보여주겠다면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여수 애양원 뒤편에 있는 도성마을은 애양원 원장이었던 토플 원장의 한글 이름 '도성래'의 첫 글자를 딴 한센인 정착촌이다. 1965년 보이열 원장에 이어 애양원 원장으로 취임한 토플 원장은 남아있던 수용자들을 모두 정착시키기로 결정하고 애양원 내의 부지를 따로 불하해 마을을 조성했다.

1975년 5월 8일 창립한 도성마을에는 모두 205명의 완치자가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당시 토플 원장은 도성마을 입주자에게 각 가정마다 같은 면적의 토지를 쌀 한 가마 가격에 일괄적으로 불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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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마을 조성 기념비석으로 1975년 5월 8일 창립했다는 글귀가 보인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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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도성마을에는 1200여명의 주민이 살았지만 현재 100여명만 남아있다. ⓒ 오문수

  
땅을 불하받은 도성마을 정착자들은 이후 이곳에서 축산업과 농업 등을 하며 경제적 자립을 이룰 수 있었다. 도성마을은 마을 조성과 동시에 도성조합이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사료·비료 등 농축산 관련 물품을 공동 구매하거나 공동 판매해 자립 기반을 넓혔다.

육군 전역 후 형님이 병역 기피자로 끌려가자... 형 이름으로 해병대 입대

도성마을 정착 초기에는 어려웠지만 애양원에서 만난 아내와 열심히 일해 번듯한 집도 있는 김아무개씨(88). 젊었을 적에 목포 시내에서 "좀 놀았다"고 말한 그는 "목포 건달인 용팔이도 잘 알고 가수 남진이는 후배"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두 번이나 군대에 간 사연과 아내와 함께 도성마을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해줬다.

김아무개씨가 처음 육군에 입대한 병적증명서를 보면 그는 1936년생이다. 그는 1956년 11월 30일에 육군에 입대해 1957년 6월 29일에 의병 제대했다. "발병했었느냐?"고 묻자 "그렇지는 않았지만 몸이 조금 이상해 의병 제대했다"고 대답했다.


목포 해변가 술집을 전전하며 놀던 그가 어느날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큰일났다! 형이 병역 기피자로 경찰서에 잡혀갔다"고 했다. 경찰서에 갔더니 '목포해병대 수용소에 가둬 놨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특정한 직업이 없었고, 형이 인쇄소를 운영해 부모님과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었기 때문에 형이 군대에 가면 온 가족이 굶어야 할 판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해병대를 찾아갔다. 막사에 갔더니 800명 정도가 잡혀와 있었다. 해병대 담당자를 찾아간 그는 집안 사정 이야기를 하고 "형 대신에 해병대에 입대하겠다"고 한 뒤 입영열차가 떠나기 직전에 형님 윗도리를 갈아입고 진해 해병대 훈련소로 갔다.

그가 보여준 또다른 병적증명서에는 형의 출생 연도가 1933년으로 기록돼 있다. 형의 이름으로 1958년 2월 3일 해병대에 입대한 그는 1962년 7월 28일 의병 제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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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모씨가 보여준 사진으로 왼쪽 사진은 해병대 하사로 임관할 때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살아있는 동기들은 알아보겠지만 "아마 대부분 세상을 떴을 것"이라고 말하며 사진을 찍어도 괜찮다고 했다. 오른쪽 사진은 5.16군사쿠데타 당시 해병대전차장으로 남산에 출동해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 오문수

     
"신병훈련소에서 M1 소총 분해 훈련할 때 제일 먼저 했더니 '김 이병 너 똑똑하니 소대 향도 맡아라'고 해서 소대 향도가 됐는데, 인원 보고를 잘하니까 중대 향도까지 시키더라고요. 그랬는데 하루는 학과 출장 보고가 늦었다는 이유로 몽둥이로 30대를 때리는 동안 숫자를 세다가 기절해버렸어요."

그는 군병원에서 퇴원 후 다시 해병대에 돌아와 해병대 78기로 하사 계급장을 달았다. "김포해병대에 근무할 당시 5.16이 일어나 서울 시내에 출동했지만 서로 피를 흘리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말한 그에게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한센병이 발병했기 때문이다.

"해병대라 추운 물속에 들어가고 몽둥이로 매 맞느라 발병한 것 같아요."

전역 후 집에서 간병하던 어느 날 한센병 특효약으로 알려진 DDS를 과다 복용해 몸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64년에 애양원에 입원 후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갔다. 당시 병 치료를 위해 한센인들이 노력한 얘기를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하다.

"한센병 치료에 좋다고 해서 수은을 태워나오는 증기를 종이 깔대기를 만들어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었다니까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퍼진 잘못된 소문(한센병은 유전된다)으로 강제 단종수술을 당한 부부는 1살 짜리 아이를 입양했지만 1998년 의경에 근무하던 아이가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가족이라고는 단 둘뿐인 이들을 찾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느님이 부를 날만 기다린다는 그들 부부의 얼굴에 외로움이 묻어났다. 

구례에 살다가 발병해 애양원에 들어와 남편과 결혼해 산 햇수가 58년째라는 부인은 "저 양반이 이곳에 들어와 술 담배를 끊고 하느님을 믿고 사는 게 고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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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마을 입구에는 정착촌 주민들이 피땀흘려 가꿨던 축산농장의 흔적이 남아있고 전봇대를 따라가면 손양원목사 기념관이 있다. ⓒ 오문수

  
1959년도만 해도 1200명 정도였던 도성마을에는 현재 한센인이 47명이 남아있고 지인들 포함해 100여 명이 살고 있다. "찾아주는 사람이 없는데 이곳까지 찾아줘서 고맙다"며 손을 흔드는 노부부의 건강을 빌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덧붙이는 글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도성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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