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부당해고 그린 영화 <카트>의 한 장면
명필름
기다리던 합격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는 순간 약간의 희열을 느꼈다. '나도 이제 직장인이 되는 거구나' 기대감이 몰려왔다. 심지어 정규직이었다. 경력도 없고 가정주부로만 20년을 살아온 내가 정규직으로 일하게 된 것은 그야말로 복권당첨 같았다. 근무에 앞서 서비스교육과 안전교육 등을 들었다. 개점을 앞두고 내부 시공이 한창인 마트에서 하루 200~300명의 사람들과 교육을 들었다.
나와 함께 입사해 교육을 듣는 사람들도 대부분 40대 기혼 여성이었다. 내가 결혼을 하던 1990년대만 해도 여자들은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으면 일을 그만둬야 했다. 결혼을 늦게 하면 노처녀 소리를 들었고 아이를 집에 두고 나와 일하면 독한년, 나쁜 엄마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엔 40대 아줌마가 노동시장에서 환영받는 존재라고 했다.
생산직 공장은 45세 미만이면 기혼여성도 들어갈 수 있고 마트나 쇼핑몰 같은 서비스업은 경력도 자격도 따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서 있어야하고 여러 고객을 응대하는 일이라 나이가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고 했다. 임⋅출⋅육으로 인한 오랜 공백이 나를 움츠려들게 만들었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고급인력'이었다. 교육을 마치고 출근한 첫날 내 생의 첫 근로계약서도 적었다.
마트에서 일하는 이들은 모두 같아 보이지만, 마트가 직접 채용한 정규직과 협력업체 파견노동자가 섞여 있다. 협력업체 상품을 하나라도 더 팔아야 하는 파견노동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 심했고 마트에서 시키는 일까지 부담해야 했다. 마트 할인기간이나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한 날에는 특별매대를 설치해 상품을 진열하고 정리하느라 철야작업을 해야 했다.
명절에는 대량으로 구매하는 고객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밥도 먹지 않고 일했다. 창고에는 선물세트가 천장까지 쌓였다. 일부 마트 직원들의 갑질이 파견노동자를 더욱 서럽게 만들기도 했다. 치열하게 일하는 파견노동자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정규직이라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저는 애들 봐야 해서 노동조합 그런 거 못해요
입사한 지 2년이 되었을 무렵 우리 마트에도 노동조합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 노동조합을 하려면 조합원들을 이끌어줄 간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여자는 남자처럼 추진력도 없고 아줌마는 집안일에 남편과 아이들까지 돌봐야 하는 판에 노동조합 활동을 해낼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줌마 간부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하였다. 나도 아내이자 엄마의 역할은 이전만큼 못하게 되었지만 노동자라는 자부심과 가족들의 인정은 커져갔다.
나는 조직국장으로 수도권에 새로 생기는 지점이 있으면 달려가 노동조합을 홍보했다. 조합원은 계속 늘었고 처음엔 어색해하던 조합원들도 어느새 당당히 노동조합 어깨띠를 둘러매고 근무했다. 우리가 일하는 일터를 우리가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우리를 '아줌마'라고 부르던 관리자들도 '여사님'이라고 호칭을 바꿔 불러줬다.
그렇게 일을 하다 다쳐서 쉬게 되었다.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산재를 받았을까' 싶었다. 그 무렵 회사가 투자회사로 넘어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노동조합은 회사에 입장을 요구했고 회사는 노동자들의 고용승계를 보장했다. 그러나 산재로 일을 할 수 없던 나는 고용승계가 어렵다고 했다. 나는 다친 김에 쉬고 싶었던 터라 퇴사를 받아들였다.
몇 개월 뒤 같이 일하던 관리자에게 자신이 일하는 지점으로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의 말을 믿고 이력서를 넣었지만 채용되지 못했다. 나중에 전해들은 말이 기가 찼다. "민정씨가 노동조합 활동을 한 게 기록에 남아있어서 안 된다네 나도 몰랐어 미안해." 그 후에도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소위 말하는 '블랙리스트'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