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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뜨면 싸돌아다녀" 엄마가 이러는 이유

아빠를 떠나보낸 지 2주... 엄마가 슬픔을 견디는 방식

등록 2024.03.12 08:20수정 2024.03.12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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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88234라는 말이 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죽는다라는 뜻으로 누구나 바라는 생의 마지막 모습이다. 아빠는 7788234를 해냈다. 남겨진 사람은 99를 원했지만 그보다 어려운 '88234'가 됐으니 좋은 거라고 애써 믿는다.


아빠를 보낸 지 2주차다. 234가 좋다고 아무리 믿는다 해도 수시로 목이 막힌다. 둘이 살다가 혼자 남겨진 엄마에겐 더 그렇기에 나는 매일 전화한다. 엄마가 전화를 받을 때마다 주변이 소란스럽다. 매일 어딜 그리 가냐고 물었다. 

"아침 먹자마자 뛰쳐 나와서 눈만 뜨면 싸돌아다녀. 집에 있으면 아빠가 방에서 나올 거 같아서 자꾸 기다리거든."

엄마 목소리 끝에 물기가 어린다. 대답할 수 없는 나와 말을 참는 엄마 사이를 침묵이 채운다. 침묵은 지나치게 싱싱한 감정을 에누리 없이 전달한다. 내가 먼저 선수쳐본다.

"엄마, 서울 와서 쇼핑할래?"

남대문 시장이 좋다는 엄마를 위해 서울역 기차표를 보냈다. 새벽 냄새를 안은 엄마와 기차 플랫폼에서 만났다. 엄마 입술의 붉은 윤기가 이리도 고마운 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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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만나러 가는 길 망설임 없이 그냥 올라와주는 엄마가 고맙다 ⓒ 최은영

 
나는 심각한 길치다. 특히 시장 골목은 우주 카오스다. 그에 반해 엄마는 이 바닥 30년 도매상처럼 단박에 파악한다. 그 발걸음이 너무 경쾌해서 내 어두운 현명함도 덩달아 경쾌해진다. 한참을 돌아다니는데 엄마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뭐여, 내가 가자고 할 땐 됐다드니 딸랑구가 부르니까 휙 가브렀냐. 딸 없는 나는 서럽다야."

엄마는 딸 덕에 알차게 쇼핑한다고 자랑하면서 내게 윙크한다. 나는 다음에 이모(엄마 친구)도 올라오시라고 너스레를 떨어본다. 허기를 채우러 식당에 들어갔다. 뜨끈한 갈치조림을 한 입 떠먹은 우리는 동시에 "완전 아빠 스타일이네"라고 읊조렸다. 울지는 않았다. 우리가 아빠 몫까지 많이 먹자며 잠깐 맺힌 눈물을 쓱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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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갈치조림 음식으로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은 오감으로 선명해서 더 아프다 ⓒ 최은영

 
애도는 때 된다고 어디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애달프게 쌓아야 한다. 마음의 작은 틈까지 눌러붙은 힘 센 슬픔이 녹아내릴 때까지 참지 않고 울기로 했다. 혼자 돌아갈 빈 집에서 엄마는 또 한번 울겠지만, 그 울음을 베개처럼 베고 다시 잠이 들 것이다. 그 잠이 까마득하게 깊기만 하기를, 그래서 아침이 되면 지나치게 명백한 슬픔이 한 톨 숨만큼이라도 가벼워지기를 기도했다. 

엄마에게 힘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스스로 채워질 힘을 기다릴 뿐이다. 엄마가 집에만 고여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시간 날 때마다 싸돌아 다니며 탁 트인 공간에서 툭 떨어지는 햇빛을 온몸으로 맞다보면 슬픔도 빛바래질 거라 믿는다.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왔다. 각자의 방법으로 통과한 애도가 잠시 끝나는 시간, 우리는 말없이 꼭 껴안으며 등을 쓸었다. 엄마가 탈 기차가 전광판에서 반짝거렸다. 엄마는 플랫폼으로 내려갔고 나는 다음주에 엄마랑 볼 대학로 연극 검색을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개인sns에도 올라갑니다
#죽음이후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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