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내내 전전했던 한 평 남짓한 원룸 중에 유독 창이 작은 방에 살 때였다. 신림동이었고 지대가 낮은 곳의 1층이었는데 그 작은 창으로 볕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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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나는 돌이켜보면 형체가 불분명한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 느닷없이 맞닥뜨린 애인의 폭력에 대한 분노, 홈리스, 비정규직, 매일같이 마주치는 가난에 시달리는 노인들을 보며 사무치는 이 사회구조에 대한 분노, 분노, 분노.
20대 내내 전전했던 한 평 남짓한 원룸 중에 유독 창이 작은 방에 살 때였다. 신림동이었고 지대가 낮은 곳의 1층이었는데 그 작은 창으로 볕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방 바로 옆 주차장의 매연은 꼬박 들이쳤다. 오며가며 만났던 굽은 허리의 키가 작은 할머니는 하루 종일 그 근방에서 폐지를 주웠다. 내가 그곳에 살기 훨씬 전부터 그랬던 것 같았고 늘 쉼 없이 일했지만 할머니는 가끔 길에서 잔다고 했다.
당시의 나는 가끔 음료를 하나씩 사서 할머니와 나누어 마시면서 할머니의 빈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나 혼자서는 무엇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매연냄새가 새어 들어오는 골방에 앉아 가끔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잠들 할머니를 생각했다. 나는 어렸고 분노의 방향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선명하고 또렷한 분노와 무력감 사이를 매일같이 오갔다.
낭떠러지 앞에서 걸어 나오다
지금 생각해보면 잔뜩 부풀기만 한 그 분노에 떠밀려 '운동'이란 것을 시작했던 것 같다. 처음 진보정당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불분명한 형태의 분노가 구체적 저항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밟았지만, 그 운동사회 내에서도 여러 번의 성폭력을 경험했다. 사건화하여 가해자의 징계를 받아낸 사건들은 결과적으로는 해결되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각각의 사건 모두 나의 에너지와 시간, 건강을 갉아먹었다. 30대에 갓 들어섰을 무렵, 이 모든 것들이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 면역 질환으로 나타났다. 통증이 극심해 일상생활이 유지되지 않아 활동을 2년간 활동을 그만둬야 했다. 성폭력 가해자와 오랜 소송을 하는 동안 질병은 악화되었고, 내가 사랑해마지않았던 할머니의 죽음과도 대면해야 했다. '고통'이 인간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늘 낭떠러지를 한 발짝 뒤에 두고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이 과정들은 모두 나에게 상흔만을 남기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당시의 나는 10대의 나처럼 무력하진 않았다. 낯모를 여성들이 낯모르는 나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가해자들은 나의 일상을, 세계를 모두 무너뜨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나는 연대하는 이들의 손을 단단히 붙들고 그 모든 과정에 맞서 싸웠다. 나는 무너지지 않았고, 나의 일상을 탄탄히 지키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나의 전 생애를 지배하고 있던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그녀들이 내미는 손을 잡고 낭떠러지 앞에서 조심조심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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