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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부터 남편 폭력까지... 그녀에게 해방감 준 '공간'

[3.8에 들려주고 싶은 나, 여성, 노동자 ③-1] 여성노동자들의 삶 속에서 나를 만나다

등록 2024.03.12 15:06수정 2024.03.1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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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내가 활동하고 있는 이 공간은 여성 청소노동자들이 조합원의 대다수인 노동조합이다.
지금 내가 활동하고 있는 이 공간은 여성 청소노동자들이 조합원의 대다수인 노동조합이다.elements.envato
 
나는 이후 더 많은 여성노동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삶 속에서 나를, 할머니를, 어머니를 보았다. 이제는 분노나 의욕보다 체념을 체화해가던 어머니를 이해한다. 평생 화 한 번 내지 않고 살아온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욕을 쏟아냈을 때에는 놀람보다 슬픔이 앞섰다. 그들의 말 속에 어머니의 체념이, 할머니의 분노가 그대로 배어있었다. 그들을 인터뷰하는 일은 내 생애를 돌아보는 일과도 같았다. 우리는 인터뷰를 하면서 서로의 삶을 어루만졌다.

내가 만났던 한 여성노동자는 남편의 폭력 때문에 노동조합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부터 결혼 후 남편의 폭력까지 그는 전 생애에 걸쳐 폭력에 노출되어있었다. 그의 삶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이 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 활동은 더 심각한 남편의 폭력을 유발했지만, 이 여성노동자는 남편에게 거짓말을 해서라도 노동조합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노동조합을 통해 처음 '해방감'이라는 것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이는 내게 여성노동자에게 노동조합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중요한 계기 중 하나였다.

외면당해 온, 삭제되어 온 여성노동자들의 역사가 선명해지는 만큼 우리가 그렇게 나는 지금 활동하고 있는 이곳으로 왔다. 노동조합 상근자는 이전의 노동운동 단체나 인권 단체 활동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투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의 비정규직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일상'을 늘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내가 활동하고 있는 이 공간은 여성 청소노동자들이 조합원의 대다수인 노동조합이다. 대학이나 일반 빌딩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들은 모두가 알다시피 대다수가 여성이다. 시설, 경비노동자는 대다수가 남성이다. 성별 직군 분리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업장들이다.

시설, 경비노동자들이 경험하는 차별과 청소노동자들이 경험하는 차별은 종류나 깊이가 다르다. 청소노동은 대표적인 '더티 워크'로 청소노동자들 스스로도 자신의 노동을 비하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합원들과 대화하면서 '이런 일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칭찬으로 공유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다른 직군의 남성노동자들로부터 무시와 차별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성노동자 대부분이 임신, 출산, 육아를 거쳐 고령의 나이에 이 사업장에 들어오게 되었다. 나이가 있으니 이런 일밖에 구할 수 없었고, 가사노동에 청소노동이 포함되어 있으니 청소노동을 많이 권유받는다고 했다. 스스로도 청소노동에 대한 낙인과 고정관념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이 노동을 선택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여성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조합 활동은 사측과 투쟁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남성노동자들과, 또 차별과 멸시를 내재화하는 스스로와도 투쟁하는 과정이었다.

난생처음 투쟁이란 것을 맞닥뜨리면서 처음엔 관리자들의 폭력에 속수무책이던 이들이 다른 동료가 폭력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 동료를 구하기 위해 그 싸움에 앞 뒤 보지 않고 뛰어드는 것을 보았다. 내가 투쟁하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 나서지 않던 이가 동료의 고통에 마이크를 집어 드는 모습을 보았다.


노동조합의 투쟁에 대해 비관적이었다던 이가 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할 수밖에 없는지를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있다고 했다. 관리자나 남성 동료들에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던 어떤 이는 함께 투쟁하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조합 내에서, 투쟁을 거치며 성장하는 모습은 연대해 준 여성들과 함께 투쟁하며 트라우마를 이겨 온 과거의 나의 모습과도 겹쳐졌다.

연결된 우리


나는 이곳에서 조합원들의 일상을, 그리고 삶에서 노동조합 활동이 가지는 의미를 조합원들에게 그리고 노동자 대중에게 알리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 그 내용들을 정돈해 현장에서 교육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잘 아는 것 같지만 잘 모른다. 그렇기에 서로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때로는 내 이야기가 창피하게 여겨져 말을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나의 차별의 경험이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통합된다.

이곳에서 보고 들은 여성 청소노동자들의 일상과 일생은 우리가 경험한 여성 가족 구성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조합의 구성원으로서의, 노동자로서의 정체성보다, 엄마, 아내, 양육자, 돌봄자, 가사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다. 삶의 우선순위도 그에 따라 결정된다.

이와 같은 '결과'의 공통된 주요 원인은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성노동자들은 남성 가족구성원(아버지, 남편 등)의 통제 및 폭력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릴 때의 '나'나 엄마, 그리고 할머니처럼. 하지만 이러한 가부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공간이 노동조합이기도 한 것이다.

내 삶을 촘촘하게 채워온 이 모든 '경험'들이 다른 여성들의 경험들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제 안다. 나는 더 많은 여성노동자들을 만날 것이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기록할 것이다.

여성으로서 여성노동자로서 겪고 있을 수많은 차별과 폭력에서, 그로 인한 체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우리가 서로 손을 잡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믿는다. 내 과거의 경험이 그것을 알게 했다. 우리가 손을 잡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각자의 역사를 기록하고, 나의 투쟁을 증언하고,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나를, 우리를 믿는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단단은 공공운수노조 조합원입니다.
#여성의날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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