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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거운 종이쪽 한 장과 아프면 쉴 권리

[진료실에서 보내는 편지] 아픈 노동자와 의사 모두를 괴롭히는 무리한 요구에 대하여

등록 2024.03.18 09:57수정 2024.03.1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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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정신의학적 평가와 개입이란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 정여진

 
종종 의사들의 주류 정서에 의아함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진료권 침해라는 주제에 대한 반응이다. 미국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한 자유지상주의자들이나 할 법한 주장을 당당하게 펼치면서 '관치 의료'가 어떻느니 하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율성 침해'에 울분을 쏟아내는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어볼 수 있다.

그에 반해 민간보험 회사의 진료권 침해나 기업을 비롯한 일터의 갑질에 대해서 분개하는 모습은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어렵다. 필자가 아직 젊음의 끝자락이던 시절, 보험회사 직원들에게 시비도 걸고 싸우기도 자주 했던 기억이 있다. 무슨 진단 코드를 빼달라, 진단서나 소견서에 어떤 문구를 넣어달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요구들을 마구 해댔기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단지 시키는 대로 했을 그들에게 약간의 미안함은 느껴지지만 말이다(김수영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바람아, 모래야, 나는 어쩜 이렇게 작으냐...).

회사들의 진료권 침해

이따금씩 병가나 휴직 처리를 위해 병원에 소견서나 진단서를 요구하는 직장인들을 본다. 당연하게도, 나 역시 초진이라서 판단을 위한 충분한 근거가 없거나, 더 이상 쉴 필요가 없거나, 일단 일터에 복귀해 봐야 일을 지속할 수 있을지 알 수 있는 경우라면 발급을 거부한다.

문제는 진단서 발급이 가능한 경우라도 직장에서의 요구사항이 다 다르기도 하거니와 아예 터무니없는 것들도 있다는 점이다. 말도 안되는 요구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일을 해도 되는지, 안되는지에 대한 의견 제시를 요구하는 경우를 그 예시로 꼽을 수 있다. 이는 임상의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결코 아니다.

더구나 이는 직장 내에서 환경적인 지지를 어떻게 제공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특정 사건 및 상황이 증상의 '원인'이라고 명시해 달라는(!) 요구를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데, 인과관계란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에도, 증상이 잘 조절되지 않는 공황장애에 우울증도 동반되어 있는 환자가 울면서 예약일이 아닌데 찾아왔다. 진단서 때문이었다. 사립학교 교직원이라는 그는 3개월 넘게 치료를 받았지만 정상적인 근무를 할 수 있는 상태로 보이진 않았다. 얼마 동안 쉬어야 하는지 예측하기 어렵긴 하나, 대체 인력의 계약기간까지 고려해서 '6개월 이상' 중장기적 치료가 필요하다고 적어줬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을 적어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학교 측의 반응은 상식 밖이었다. 환자는 교무부장과 이사장의 녹음파일까지 들려줬는데 1년짜리 대체 인력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6개월짜리 진단서'는 안되며 '1년짜리 진단서'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만일 내가 거부한다면 3차병원 가서 1년짜리 진단서를 받아오라는 말도 했다!

처음에는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며 분개했지만, 결국에는 욱하는 마음에 이렇게 말할 수밖에. "진단서는 고쳐드리겠다. 하지만 학교 측의 갑질에는 어떤 식으로든 문제제기할 것이다"라고. 홧김에 이렇게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이내 후회가 밀려왔다. 도대체 어떻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나? 그것도 누구한테?

모 국회의원실에서 열었던 토론회에서 벌써 두 번씩이나 발언을 하지 않았던가. 예상대로 평범한 임상의의 푸념에 그쳤고, 메아리조차 없는 소음에 불과했다(문제제기하겠다던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좀 알려주길 바란다).

아무 근거 없는, '종합병원 진단서' 요구

이쯤에서 일부 동료 의사들의, 낯익은 쿨한 반응이 연상된다.

"그냥 안 써주면 되지. 무슨 상관이야? 3차병원 가시라고 하든가. 이렇게 의사들이 온정적으로 나오니까 직장에서도 무리한 진단서를 요구한다고!"

그러나, '그냥 안 써주면 되는 일'도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진단서 요구가 단지 환자의 탓은 아니기 때문이다. 평범한 노동자들이 대한민국의 직장에서 갑질에 당당하게 맞설 만한 권력이 있을 리가 만무하니 환자가 딱할 때가 많다. 자신이 정말 아픈지, 얼마나 아픈지를 증명해내야만 쉴 수 있는 것도 모자라, 때때로 '일을 할 수 없다'는 보증을 원하는 경우마저 있다. 이쯤되면 사측에서는 노동자의 호소가 꾀병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거나, 가능한 아픈 것을 참는 데까지 참으라는 요구를 하고 있지 않나 의심스럽다.

더 씁쓸한 것은, 병가 인정이나 휴직 승인을 위해서는 "종합병원 이상의 의료기관 진단서만 인정한다"는 요구를 볼 때다. 1차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아왔던 환자가 뒤늦게야 이러한 사실을 알고 3차 병원을 예약하려고 하지만, 이미 연차를 다 써버린 후라서, 교수 얼굴을 보기까지 몇 주씩이나 기다릴 수가 없다. 그래서 며칠 기다려 나를 찾아온 것이다.

개원의 선생님들과 2차 종합병원에서 일하는 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의료 전달체계 상의 분업에 불과한 구분이 어느새 위계로 둔갑해 있는 것이다. 당연히 첫 면담에서 환자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이며, 비록 안타까워도 서류 발급이 안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의사들이 들어주지 말아야 회사도 황당한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발상은 너무나 순진하다. 한국 자본주의는 사람을 한낱 소모품으로 대하며, 노동력을 제외한 인격의 다른 측면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해 왔다. 노동자가 이전과 같은 수준의 노동을 할 수 없다면 새로운 노동력을 구매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아프면 쉴 권리'는 이윤 축적을 위한 무한 경쟁시대에서 단지 사치에 불과할 뿐이요, 조직에 끼칠 손해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심으로 치부된다.

전문가의 보증 없이 아프면 쉴 권리

나 역시도 '전문가의 보증' 없이도 아프면 쉴 수 있거나 자율적으로 노동환경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당장 구현이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질환의 원인을 불문하고(대개는 알 수 없다) '아프면 쉴 권리'의 명문화와 실질화가 필요하다.

상병수당뿐만 아니라 진단서 제출을 포함한 의료의 이용에 관해서도 합리적인 지침이 사회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각 직장에서 알아서 정하게끔 한다면, 의사나 환자나 난감한 상황이 지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정여진 님은 정신과 전문의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회원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3월호에도 실립니다.
#진단서 #아프면쉴권리 #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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