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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하는 사람이 마스크도 안 써? 이유가 있었습니다

[일터 기후정의 공론장] 현장 가이드는 없고, 노동자 숨통은 조여 왔다

등록 2024.03.21 11:27수정 2024.03.2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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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내담자가 상담실 문을 두드렸다. 한 요양원에서 일하는 조리사였다. 경력이 오랜 분이었는데, 최근 고용 계약이 연장되지 않았다. 갱신 기대권이 좌절된 데 대해 부당 해고를 다투기 위해 찾아왔다.

요양원은 고용 계약을 갱신하지 않은 이유를 여럿 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여름에 마스크를 쓰지 않아 위생을 잘 지키지 않은 것'이었다. 그를 상담하기 전에는 '어떻게 조리하는 사람이 마스크도 안 쓸까?' 단순히 생각했다. 하지만 상담 후 내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연일 최고 온도를 새로 쓰는 폭염에, 환기도 되지 않아 푹푹 찌는 조리실에서 그는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어 '결국' 마스크를 벗었던 것이었다. 

혹서기 혹한기에 무너지는 노동자 건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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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2일, 잠실 쿠팡본사 앞에서 대구2물류센터 故장덕준 노동자 3주기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참여자들은 과로사 없는, 야간노동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다짐을 나누었다. ⓒ 유경희

 
푹푹 찌는 더운 여름에는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고 갈증이 난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요리하는 조리사뿐만 아니라 야외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나 배달 라이더, 택배원, 검침원 등도 살인적인 날씨와 바쁜 스케줄 탓에 이중고를 겪는다. 특히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 산재 피해가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건 건설업 노동자이다. 매년 온열질환으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업환경 개선은 더딘 현실이다. 

겨울이라고 안전한 것도 아니다. 급격히 낮아지는 온도에 저체온증이 발생하기도 한다. 추운 날씨에 콘크리트 양생을 위해 태운 갈탄으로 인해 일산화탄소에 중독되는 일도 흔하다. 구토와 어지러움 등 가벼운 일산화탄소 중독 증상으로 넘어가기도 하지만, 사망하는 일도 매년 발생한다. 

쿠팡 물류센터도 추위와 더위에 매우 취약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애초 거대한 창고로 지어진 물류센터들은 추위나 더위를 효과적으로 막지 못한다. 여름에는 실내 온도가 지속적으로 30도가 넘는데 에어컨도 가동하지 않아 지탄을 받았다. 게다가 물류센터 노동자들은 혹서기, 혹한기에도 밤을 꼬박 새워 일해야 한다. 가뜩이나 날씨로 인해 몸에 부담이 큰데, 높은 노동강도에 야간노동까지, 노동자의 건강권은 무너지고 있다. 

철저한 관리·감독 절실, '예방 가이드'는 노동자 현실 반영해야

혹서기와 혹한기에 야간노동까지 불사하는 노동자에게 고용노동부의 예방 가이드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실질적으로 현장에서 예방 가이드가 잘 지켜지는지 사업장 관리, 감독도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고, '권고사항'에 그치는 것으로 다양한 현장에서 실효성이 있는지 점검도 되고 있지 않다. 


고용노동부는 여름철 폭염 온열질환 예방 가이드에 '물, 그늘, 휴식 지키기', '적절한 휴게시간 보장'을 명시했지만, 현장에선 잘 지켜지지 않는다. 또 가이드는 실외 작업장, 실내 작업장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이에 따라 가이드를 제시하는데, 실내이면서도 실외나 마찬가지인 물류센터같은 공간에서는 실효성이 더욱 낮다. 

동절기 안전보건 가이드는 산재 피해가 가장 많은 건설업 위주로 제작됐으며, 다른 업종과 관련한 예방 대책은 찾기 힘들었다. 혹서기와 혹한기에 노동자마다 위험 요인이 다르고 그에 따른 예방수칙이 각각 다름에도 여러 업종을 고려한 예방 가이드는 없었고, 책상 위 '가이드'로만 존재했다.

이처럼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앞선다. 혹서기와 혹한기에 높은 노동강도는 많은 부담을 초래하기에, 최소한 노동자들이 적절히 쉴 수 있도록 휴게시간이 제대로 지켜져야 한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566조(휴식 등)에 관련해 고용노동부 차원에서 철저한 관리·감독을 시행해야 한다.

더불어 노동자의 실질적인 노동시간 단축과 위험할 때는 잠시 멈추고 재개할 수 있는 작업중지권 확대도 같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여름철 온열질환이나 겨울철 갈탄으로 인한 일산화탄소 중독 등 사고는 안전 수칙을 잘 지킨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노동자가 건강할 때 아프지 않도록 미리미리 살펴야 하고, 노동자에게 '더 많이', '더 빨리'를 종용하는 사회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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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고용노동부는 여름철 폭염 온열질환, 겨울철 한파 한랭질환 예방가이드를 배부했다. 노동자가 급박한 위험 시 작업중지를 할 수 있고, 사업주는 강도를 낮추는 등 조치를 하라고 하지만, '권고사항'일 뿐이다. ⓒ 안전보건공단

 
여름과 겨울이 지나면, 또 여름이 오기에

지난해 가을 'N개의 기후정의 학교'에서 쿠팡 노조를 만났을 때 마음이 답답했다. 폭염 시기에 노동자 온열질환 개선 요구를 외쳤지만, 선선한 가을이 되자 사측과 오가던 논의마저 물거품이 됐다고 한다. 쿠팡은 대부분의 노동자를 일용직으로 채용해 바로 현장에 투입하기에 장기적인 개선 대책도 논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혹서기와 혹한기 사고는 그저 한 계절이 지나면 스쳐 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름과 겨울이 지나면 또 여름이 온다. 

올해는 2월부터 따듯한 바람이 분다. 환경오염에 따른 기후 위기를 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점차 사계절의 구분은 점점 흐려지고 여름은 더 덥고 겨울은 더 춥다. 하지만, 노동자는 일하고 싶은 날을 선택해 일할 수 없다. 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더워 숨이 막혀오는 날이든 지나치게 추워서 한 걸음조차 떼기 힘든 날이든 묵묵히 출근해 일해야 한다. 조리실에서 매 끼니를 제공하는 조리사도, 한 겹씩 철근을 쌓아 올리는 건설 현장 노동자도, 이곳저곳 택배를 나르는 노동자도, 전기와 가스 사용량을 점검하는 검침원도, 폭염이나 혹한에도 올빼미처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야 하는 청소노동자도 안전하고 건강하게 '사람답게' 일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유경희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후정의팀 회원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 <일터> 3월호에도 실립니다.
#기후정의 #혹한 #온열질환 #가이드라인 #폭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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