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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정조가 직접 지은 이름... 명당 산 이름 따랐다

[화성시 민속 문화이야기] 융릉이 자리한 터

등록 2024.03.25 16:10수정 2024.03.25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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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융건릉 서측방향 상공 항공촬영 ⓒ화성시청 ⓒ 화성시민신문


영화 <파묘>가 관객수 천만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도 <관상>이나 <명당>처럼 비과학적이라 여겨지면서도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개념들을 활용한 영화들이 나왔었지만, 천만영화를 바라보는 흥행을 기록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화성문화원에서 근무하며 화성의 가정신앙과 관련된 강좌를 개설한 적이 있다. 강의를 들으러 오신 많은 시민들과 소통하다 보니 다양한 궁금증을 가지고 계셨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는 이사 전 새집 부엌에 밥솥을 먼저 가져다 놓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옛 풍속에서 부엌의 불을 꺼뜨리지 않고 새집에 가져가던 것이 변형된 것일 수 있다는 의견을 나누고 나니 부엌에 정한수를 떠 놓는 분, 차를 사면 막거리를 바퀴에 부어 고사를 지내는 분 등 생각보다 전통적인 민속문화가 현대인들에게도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화성문화원에서 화성지역의 민속문화와 설화에 대해 고민했던 탓인지 영화 <파묘>를 보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영화에서 풍수사로 분한 최민식씨의 대사 중 "지금은 65점짜리만 되도 명당이고 더 좋은 명당은 옛날 고관대작들이 벌서 다 차지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그 고관대작들이 차지한 명당중 왕이 기운을 받은 최고의 명당이 화성시에 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정조대왕의 효심으로 정성을 들여 자리 잡은 융릉이 바로 그곳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조가 아버지의 능을 조성하기 위하여 지관과 같이 지세를 살피고 있는데 과천쯤을 지날 때 산꼭대기에서 묘를 쓰려하는 총각이 있었다. 정조와 정조의 지관이 묫자리를 살펴보니 조금만 높은 위치에 묘를 쓰면 좋은 풍수인데 낮은 곳에 쓰는 것이 이상하여 물어봤다고 한다.

그 총각이 말하길 자신은 머슴살이를하며 홀어머니를 모시기에 돈이 없어 동네 사람들의 지원으로 겨우 산소를 쓰는데 위치를 옮기기 위해 더 돈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정조가 마음이 좋지 않아 쌀 열가마와 베 스무필을 하사하여 위치를 옮기도록 도와준 뒤에 혼내줄 요량으로 이 자리를 점지해 준 지관을 불렀다. 그 지관에게 왜 좋지 않은 자리를 잡았는지 물었더니 그 지관의 이야기가 명답이었다. 이 자리는 사시(巳時) 하관에 오시(午時) 발복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하관을 하자마자 정조의 눈에 띄어 쌀과 베를 얻었으니 그 말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이에 정조가 당대의 명 지관이었던 박상의와 숨겨진 명지관 홍씨가 함께 찾고 찾은 명당이 바로 융릉의 터였다는 것이다. 

화성, 접근 방식 달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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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융건릉 항공촬영 ⓒ화성시청 ⓒ 화성시민신문


지금은 현안에 따라 대립하거나 협력하는 경기 남부의 세 도시 수원과 화성, 오산이 원래는 하나의 도시였기에 많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할 수밖에 없다. 수원읍이 독립하며 행정과 문화의 중심이 오산읍으로 옮겨 갔고 오산읍도 독립해 버린 상황을 생각하면 왜 화성의 문화 발전이 시민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늦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이유를 시민들이 이해하고 기다려야 할 이유는 없기에 자주 비교의 대상이 되기도 해 여러 문화 관련 실무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한다.


최근 화성의 지역성을 활용한 청년창업 강좌와 관련해 자문한 적이 있는데 그들의 모델이 힙스터들의 성지가 된 행궁동이었다. 성공한 사례를 배우는 것은 좋으나 그 배운 것을 활용할 때는 우리가 가진 역량과 환경을 잘 이해하고 우리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조대왕이 살아서 활약한 수원과 영혼의 안식처인 화성은 접근이 달라야 하는 것이다.

화성의 이름은 융릉이 자리한 명당터의 산인 화산(花山)에서 유래한다. 화성의 이름을 지은 유래는 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정조실록 > 정조18년갑인 > 1월15일 >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이다.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하여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고 하였는데 화(花)자와 화(華)자는 통용된다.

실록에 등장하는 화지역을 지키는 사람이 요임금에게 한 세 가지 축원은 오래 사는 것, 부를 얻는 것, 자손을 많이 얻는 것이었다. 화봉삼축의 이야기 속 요임금은 이 세 가지를 각각의 이유를 들어 사양 했지만 정조대왕의 명당 터에 자리를 잡아서인지 지금의 화성은 이 세 가지를 고루고루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지명은 그 이름을 지은 사람도 왜 그렇게 지은 지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화성시는 정조대왕이 직접 명당을 정해 그 명당의 산 이름을 따 이름을 지었고 그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아주 특이한 경우다. 수원읍이 수원시가 될 때 그것을 정한 사람들은 이 귀한 이름을 버리고 자연 지명을 택했다. 그들이 화성시민을 생각하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화성시민은 어찌 보면 그들에게 멋진 이름을 선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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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전 화성문화원 연구원 ⓒ 화성시민신문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구비문학을 전공한 연구자입니다. 이 기사는 화성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화성문화원 #화성시 #명당 #융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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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빠진 독 주변에 피는 꽃, 화성시민신문 http://www.hspublic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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