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 투표 첫날, 나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 투표참관인으로 이번 선거에 동참한다는 뿌듯함이 녹아있는 투표참관인 명찰
김보민
투표함에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일회용 자물쇠로 투표함의 앞쪽과 뒤쪽을 잠근다. 특수봉인지 위에 투표관리관과 투표참관인이 성명을 기재한 후 자물쇠 위에 부착해 투표함을 봉인한다. 투표 관리관, 책임위원, 투표참관인, 투표장 안내 요원 등이 모두 투표장에 모인 오전 8시, 책임위원이 투표 개시를 선언하면 그날 하루 투표가 시작된다.
매사추세츠주를 비롯해 인근 네 개의 주에 사는 한인이 3만 명 이상이어서 보스턴에는 두 곳의 투표장이 마련됐다. 내가 투표참관인으로 상주한 곳은 몇 달 전 여권을 갱신하기 위해 방문했던 보스턴 총영사관이다.
책임 위원 및 다른 투표참관인 등 투표소에 모인 사람들이 가장 먼저 투표했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이름·생년월일을 통한 본인 확인, 전자서명을 한 후 투표용지 2장과 회송용 봉투를 받았다. 50cm가 넘는 비례대표 투표용지를 실물로 보고 입이 딱 벌어졌다. 투표장에 가기 전, 나의 소중한 한 표를 던질 후보와 정당을 미리 생각해 뒀지만 서른여덟 개의 정당명을 빛의 속도로 훑은 후, 정갈한 마음으로 각각의 투표 용지에 기표했다.
기다란 비례대표 투표용지를 알뜰하게 접어 회송용 봉투에 넣고 봉인했다. 회송용 봉투 겉면에는 나의 선거구와 주소가 명시되어 있었다. 4월 10일에 이 봉투가 열릴 것을 생각하니 떨리는 마음이 손 끝으로 느껴졌다.
투표장 떠나지 못하는 불법체류자
이른 아침이었지만 투표장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나처럼 체류 비자를 소지하고 미국에 체류하는 한인의 경우, 여권만 제시하면 본인 확인이 가능하다. 하지만 미 영주권자들의 경우 여권 확인 후 영주권 카드까지 확인되어야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 투표를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2시간을 운전해 오신 한 분은 영주권 카드를 가지고 오지 않아 투표장 앞에서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가야 했다.
또 어떤 분은 지난 202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외 선거를 하고 나면 자동으로 계속해서 재외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고 여겨 이번 선거를 위한 국외 부재자 신고를 하지 않아 투표를 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국외 부재자 신고를 미리 하지 않은 분 중 볼멘소리를 하던 분도 있었다. 선거관리위원회 이름으로 보스턴의 한인 온라인 뉴스 사이트와 한인 식당 및 한인 대형 슈퍼매장 등에 재외 선거 안내를 했지만, 자신은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4월 총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본인이 해외에서 살고 있다면 해외 체류자가 선거에 참여하는 방법을 미리 찾아보는 것도 유권자의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점심시간 직전, 대학생들로 보이는 앳된 청년들이 삼삼오오 투표장을 찾았다. 보스턴과 매사추세츠주에는 대학이 많아 한인 유학생도 많다. 풋풋한 대학생들을 보니 나의 인생 첫 번째 투표가 떠올랐다. 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뜨거웠던 2002년, 21세기 들어 처음으로 치러진 제 16대 대통령 선거가 그것이다.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만나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선거가 펼쳐졌고, 잊을 수 없는 대통령을 당선시킨 선거였다. 이번 총선에 참여하는 대학생들도 이번 투표가 자신들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무수히 줄 것이라 여길까 궁금했다.
한참 전에 본인 확인을 했는데 아직도 투표장을 떠나지 않고 계신 분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이 가지고 오신 여권으로는 본인 확인이 어렵다고 했다. 전산상으로는 주민등록이 이미 말소되었고, 미국 체류가 허용된 서류는 없는 상태, '불법체류자'였다.
언제 어떻게 이 멀리까지 와서 생활하다 불법체류자가 되었을까? 해외에 살고 있고, 해외살이를 하는 다른 이민자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가 있기에 이 단어가 지닌 무게와 고단함이 저절로 상상되었다. 투표장을 떠나는, 성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이의 뒷모습을 보며 무탈하시라는 말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투표 마감 30분 전 다시 오신 '그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