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홍 의병장 무덤의 비석을 쓰다듬는 인병진 후손
박도
파청 승첩비
다시 그곳을 찾았다. 곧장 집 뒤의 초라한 안 의병장 묘소에 두 번 절을 드린 뒤 후손의 안내로 그 마을에서 가까운 비둘고개에 있는 파청 승첩비로 갔다.
오호라, 공의 충성은 해와 별을 꿨고 의기는 골수를 메웠다. … 애석하다. 황천(皇天 하늘)이 도우지 않아 마침내 흉측한 무리를 말끔히 소제하여 나라의 터전을 회복치 못하고 도리어 해를 입었으니 지하에서 원한이 되리라. - <파청승첩비문> 가운데 일절
안규홍 의병 부대의 여러 전적지를 그날 하루에 도저히 다 둘러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안 의병장이 담살이를 하면서 창의의 깃발을 날린 법화마을과 가장 치열했던 의병전적지 서봉산을 보고 싶다고 부탁 드렸다. 그랬더니 두 곳 모두 광주로 돌아가는 길섶에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하필이면 그날 안병진 선생은 동네 초상이 나서 바쁜 듯하여, 길잡이 고영준 선생이 거기로 가는 길을 자세히 물어 어림잡고는 곧장 서봉산이 있는 진봉리로 달렸다.
보성에서 광주로 가는 18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몇 차례 길을 물은 끝에 서봉산을 찾았다. 그곳 일대 산들은 안규홍 의병장이 담살이를 할 때 땔감 나무를 하러 무수히 다니던 곳으로 지리에 몹시 밝은 곳이었을 게다.
하지만 당시 호남 의병들은 기껏 낫이나 죽창, 화승총이나 천보총 등 재래무기로 일군의 최신식 무기에 당할 수 없어 이곳 전투에서 일군 2명 살상에 견주어 아군은 25명이나 순절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그날 일정상 서봉산은 오르지 못한 채 아직도 멧부리에 떠돌고 있을 이름 없이 순국한 의병 혼령에게 묵념을 드리고는 발길을 법화마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