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귀한 고인돌이 정원석으로? 고인돌 수난 시대

등록 2024.04.12 10:00수정 2024.04.1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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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면 고인돌은 경작지 둘레 담으로도 활용됐고, 집집마다 담을 쌓는 데에도 사용했다. 그 귀중한 고인돌이 청산면사무소에서 정원석으로 사용되고 있는 게 보인다. ⓒ 완도신문


청산도는 고금도와 마찬가지로 고인돌이 많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고인돌이 도서지역에 있을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도서지역에서 고인돌을 형성한 세력의 존재는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이들이 많다.

당시 학계에서도 도서지역의 고인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드문드문 형태가 드러났기도 했거니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우리나라의 시대 상황이 그랬다. 여기에 더해 선사시대 인류가 아주 미개했을 것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에서만 평가했기에, 내륙의 고인돌 세력이 뗏목에 큰 바위를 싣고 가서 몇몇의 고인돌을 만들었을 것으로만 여겼다. 


하지만 사수도 해역의 선사시대 유적이 발견되면서 우리나라 고고학계는 완도군의 도서지역을 달리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유적조사 결과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선사의 유적들이 발견됐다.

청산도는 해발 385미터의 매봉산이 있고 해안선 길이는 약 42킬로미터로 비교적 작은 섬이다. 사시사철 푸르름을 유지한다고 해서 청산도로 부르게 됐고, 옛 사람들은 신선이 살고 있는 섬이라 해서 선산도나 선원도로 불러왔다.

이곳에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고인돌 유적이 있다. 문헌상의 기록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생활해오던 곳이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우리나라를 보호할 수 있는 해안방어의 요충지 역할까지 했다.

청산면 고인돌은 지난 1984년 전남문화재자료 제 116호로 지정된 이후, 현재까지는 총 3곳에서 고인돌 지역이 확인됐다. 지난 1991년 도서문화에서 청산면 선사유적 조사를 진행하면서 고인돌에 대한 일부 지표조사가 이뤄졌다. 이후 지난 1996년 전남의 지석묘와 같은 여러 논문과 자료를 통해서만 언급됐고, 2007년 문화유적분포지도에서는 총 3곳에 고인돌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타 지역의 고인돌에 비해 자세한 현황 파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로 이 지역 선사시대 문화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부족함이 많았던 상황이다. 


지난 2022년 청산면 고인돌 유적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하여 고인돌 현황을 다시 파악했고, 체계적인 정비와 활용을 위해 국가유산의 지표조사를 계획했다. 완도군과 청산면민 이장단 회의를 거쳐 마을에 전해온 이야기를 듣고 추가적으로 고인돌 관련 내용을 취합하여 조사를 마무리했다.

민속, 지명, 풍습, 관습 등에 관한 사항에 대해 마을의 원로나 관계자들을 면담했고,  고인돌 관련 지명유래 등의 이야기도 다뤘다. 원로들은 새마을 사업을 시작하면서 전부 밀어버린 고인돌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다.

또 도로부지 위에 있었던 고인돌은 전부 1미터 이상의 흙을 덮은 후 도로건설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청산면 고인돌은 경작지 둘레 담으로도 활용됐고, 집집마다 담을 쌓는 데에도 사용했다. 게다가 그 귀중한 고인돌이 청산면사무소에서 정원석으로 사용되고 있는 게 보인다. (계속)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입니다.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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