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주권국가책 표지
나남
급변하는 시대,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
<반도체 주권국가>는 기자, 정치가, 초대 중소기업벤처부 장관을 지낸 박영선이 반도체 전문가들과 공저한 저술이다.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현장에서 장기적 발전을 도모하려 했던 장관으로서 그녀는 경제와 산업을 넘어 안보와 패권의 측면에서까지 반도체의 중요성과 현황을 폭넓게 살핀다. 이제껏 반도체와 관련해 나온 많은 서적들이 있지만, 대개 그 기술적 측면이나 투자의 측면에 한정해 다루었단 걸 고려하면 이 책의 가치가 없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삼성전자가 부산광역시보다, 하이닉스가 대전광역시보다 많은 전기를 쓴다는 시대다. 특정 기업, 특히 반도체 기업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상황을 일반 시민들은 얼마 알지 못한다. 반도체가 국가의 안보며 국방에 어떻게 엮여 있는지에 대해서도, 또 향후 한국 경제를 좌우할 수 있는 반도체 관련 기술의 변화양상에 대해서도 다수 국민은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혜는 지식으로부터 피어나는 법이다. 충분한 지식을 바탕으로 복잡다단한 현상을 꿰뚫어보는 통찰이 생겨나고, 새 길을 탐색하는 시야가 트인다. 시대를 읽고 더 나은 미래를 도모하기 위하여, 자원 없는 나라의 민주시민으로 더 나은 결정을 하기 위하여서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폭넓은 지식을 습득해야만 한다.
책은 식량이며 에너지, 광물과 같이 반도체 또한 무기화된 물자임을 알리는 것으로 그 첫 장을 연다. 그 시작은 실제 전쟁에 쓰이는 무기와 반도체의 결합을 설명하는 대목으로 채워진다. 책이 베트남전쟁이라 표기하고 있는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반도체와 무기가 결합한 첫 국가 간 전쟁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1965년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이 승인한 롤링썬더 작전의 실패와 이후 이뤄진 미국 군사체계의 변화를 이 책은 주목한다.
9년 간의 베트남전쟁은 미국에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이 상처는 미국 군사체계와 군사력에 대한 근원적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 변화의 핵심이 바로 반도체에 대한 투자였다. (중략) 실패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미군 포탄의 명중률이었다. 미군의 명중률은 너무나 낮았다. (중략) 1965~1968년 명중률은 7.9%에 그쳤고 1971년 12월~1973년 명중률도 고작 10.7%에 불과했다.' - 책 18~20p
베트남전은 미군 뿐 아니라 세계 폭격의 개념 자체를 뒤바꾼다. 1,2차대전은 물론 베트남전 당시까지도 폭격의 기본은 소위 융단폭격이었다. 위에 언급한 롤링썬더 작전이 그 대표격으로, 어마어마한 물량의 폭탄을 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 위에 마구잡이로 뿌리고 돌아오는 것이다.
어차피 조준 따윈 거의 이뤄지지 않으니 전투기 조종사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야간출격, 고고도투하가 일반적이었다. 이전까지의 전쟁에서 군사시설과 관련 없는 성당, 학교, 병원 등이 많이 파괴되고, 민간인들이 수두룩하게 죽어나간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다.
그러나 명중률이 실패의 주 원인으로 떠오르면서 빠르고 정밀한 연산을 가능케 하는 반도체 내재 전자장치와 재래식 무기의 결합이 이뤄지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반도체는 패권과 안보에 빼놓을 수 없는 전략물자가 된다.
R&D 삭감, 스스로 주권 포기하는 일
물론 물자가 군사적으로만 활용될 리 만무하다.
책은 반도체가 전자장치, 특히 컴퓨터와 함께 급격히 성장해온 역사를 서술한다. 엔비디아처럼 생산은 외주화하고 설계에 주력하는 팹리스 회사들과 TSMC처럼 고도화된 반도체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업체들, 또 메모리반도체와 비메모리반도체에 주력하는 업체를 소개하고, 각국이 전략적으로 이 같은 업체를 지원하고 키워온 배경과 역사를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로부터 세계 각국이 산업은 물론 안보와 패권싸움의 측면에서 반도체를 둘러싼 기술경쟁에 참여하고 있음을 자연스레 내보인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또 한국에 대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등이 내보이는 국제무역 질서의 변화도 주요하게 그려진다. 1995년 발효된 WTO 협정 아래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한국이 새로이 생겨나고 있는 관세장벽과 무역규제 등에 대항해 보다 기민하고 전면적인 대응을 해나가야 한다는 지적도 빠지지 않는다.
반도체는 국제 분업구조가 고도로 발전한 대표적인 재화이다. 반도체 지적재산권 보유와 설계는 미국이, 생산은 한국과 대만이, 소재와 장비는 일본, 미국, 유럽이 중심이 되어 맡고 있는 분업구조가 지난 30여 년간 발전해 왔다. 이러한 반도체 지형에 새판 짜기가 진행되고 있다. 과거 석유 패권 이상의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반도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146p
꼭 <반도체 주권국가>가 아니라도 반도체며 첨단기술, 또 이에 대한 국가의 전략적 지원과 관련한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책엔 미국 정부는 물론 대기업이 시장에 막 등장한 기술부문 신생 도전자를 지원하고 보호하는 여러 사례가 등장한다. 양자컴퓨터 등과 관련하여 정부와 기업이 큰 지원금을 출자해 기술개발에 나선 사례 또한 여럿이다. 이 모두가 패권 및 주권을 기술과 함께 바라볼 수밖에 없는 현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반면 한국은? 윤석열 정부가 과학기술 분야의 R&D 예산을 16.6% 삭감하는 초유의 결정을 내린 게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주무부처라 해도 좋을 과학기술부 관계자들이 앞장서서 이를 이행하는 모습은 관련 업계 전문가들에게, 또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절망감까지 안겼다. 반도체는, 또 과학과 기술은 이 책이 말하고 있듯 이제는 무기이며 전략물자이고 주권을 지키는 핵심적 자산이다. 우리는 어째서 스스로 그 숨통을 끊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