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찰의 발포 현장을 검증하는 모습 (경무대)?
국가기록원
서울뿐만 아니라 광주, 부산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승만 정권은 계엄령을 고려했다. 내무부장관 홍진기가 계엄령 선포를 건의했고, 국방부장관 김정렬이 동의했다. 이승만의 승낙으로 오후 3시경 서울지구 일대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김정렬은 가평에 있는 국군 제15사단을 끌어 들여 시위를 무력 진압하고 했다.
이승만의 하야
시위는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4월 19일부터 4월 26일까지 계속되었다. 서울은 물론 부산, 대구, 대전, 인천, 김천, 목포, 천안, 포항, 울산, 공주, 원주, 묵호(동해), 진주, 밀양, 여수, 수원, 임실, 제천 등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 4.19 희생자 합동 위령제(1960. 4. 24. 용산 부근 옛 육군야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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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오전 8시 30분경 동대문, 세종로 일대에 7만5000여 군중이 모였다. 시위대는 광화문 사거리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뚫고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으로 나아갔다. 진압대는 이에 최루탄으로 맞섰다다. 오전 10시경 시위대는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주한미국 대사 월터 매카너기는 김정렬 국방부장관에게 정부통령 재선거 문제를 논의하고 이승만의 장래 역할을 숙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내려놓기로 결심한다. 약 한 달 뒤인 5월 29일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 4.19 혁명 당시 모습. 시위대 뒤로 중앙청 돔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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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이 남긴 것

▲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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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독재에 맞서 국민이 직접 일어나 목소리를 높인 최초의 사례이며, 대한민국 최초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가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후 시민들의 대규모 참여로 사회 전반의 민주화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학생과 시민이 사회 변화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명확히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더 큰 의미에서 볼 때, 4.19 혁명은 내전으로 확전되지 않고 비교적 평화로운 방법으로 대통령을 하야시킨 시민혁명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러한 평화적 접근 방식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시민혁명은 약 55년이 지난 박근혜 탄핵으로 이어진다.
2023년 5월 19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6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4.19 혁명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은 이 혁명의 세계적인 의미와 가치를 입증한다. 4.19 혁명을 기념하며, 우리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결코 잊지 말자. 4.10 혁명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정의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 국립4·19민주묘지 전경
박배민
일상 속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학습 놀이터
'성찰과성장'
글 작성 및 편집 : 박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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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등재, 세계가 인정한 4.19 혁명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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