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머릿속에 생각이 많은 사람을 그렸다. 요즘 아이는 머릿속에 생각이 많은가 보다.
김보민
입학 두 달 후, 둘째 아이 담임 선생님과 첫 번째 면담이 있었다. 선생님은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활발하고 유쾌한 모습이 표정과 손짓에서부터 느껴지는 분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리고, 선생님들과도 관계가 좋다며 '아름다운 아이'라며 칭찬했다. 아이에 대한 선생님의 긍정적인 피드백은 엄마인 나의 어깨를 으쓱하게 할 정도로 기분 좋은 칭찬이었다.
이어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국어'라 할 수 있는 영어 수업의 커리큘럼에 관해 설명했고, 현재 아이의 언어 이해 상태도 짚어줬다.
"혹시 아이가 영어를 사용할 때 어려움이 느끼는 것을 본 적이 없나요? 아이가 또래 친구들보다 어휘력이 떨어져요. 사물을 인지하지만, 영어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런 경우 한국어로 어떻게 표현하냐고 물어보면 한국어로 무언가 답을 해요. 그 말을 내가 못 알아듣는 게 문제지만요."
아이의 언어에 대한 선생님의 평가는 생각지도 못했다. 태어난 지 두 달 무렵 싱가포르에서 살기 시작한 둘째 아이는 그때부터 영어에 노출됐었다. 그렇기에 네 식구 중 유일한 '네이티브 스피커'라 생각한 아이인데, 영어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말 자체가 충격이었다.
아이와 집에서는 대부분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었고, 내가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기에 아이의 부족한 영어를 눈치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선생님은 아이의 인지력, 공감 능력 등에 문제가 없고, 어휘력이 다소 낮은 것뿐이니 개별 영어 수업을 보충하며 상황을 살펴보자고 했다. 이미 학교에서는 아이에게 추가 개별 수업이 진행 중이었고, 언어 담당 선생님과도 짧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참고로 미국 초등학교의 경우 입학 또는 전학 후 영어 능력을 테스트하고, 학생의 영어 레벨에 따라 추가 수업 필요 유무를 양육자에게 알려준다. 이민자의 나라인 만큼 학생들이 가정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를 확인하고, 정규 교과 과정을 따라갈 수 있는 영어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면밀히 살피는 과정이 공교육 내 시스템으로 마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밤마다 악몽 꾸며 어린이집 가기 싫다 떼쓰던 아이
둘째의 언어에 대한 피드백을 듣고 집에 오는 길, 아이가 이유 없이 불편해했던 일상들이 떠올랐다. 싱가포르에서 한동안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했고, 밤마다 악몽을 꿨다.
아침마다 등굣길에서 떼를 쓰는 통에 목마를 하고 어린이집에 갔던 날도 수두룩했다. 어디를 가나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내 뒤에 숨던 아이가 가졌던 어려움은 소심한 성격 탓이 아니라 부족한 언어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이가 힘들어한 순간들이 모두 언어에서 시작된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동안 아이의 세상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추가로 진행되는 영어 수업을 아이가 잘 따라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 줬다. 집에서는 영어와 한국어로 더 많은 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영어와 한글 문자에 노출되는 빈도도 더 높이기로 했다. 하나의 언어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니, 더디 가더라도 둘 다 골고루 노출하며 언어에 대한 자신감을 쌓아나가는 것이 방법이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