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빠에게 '경험'과 '시간'을 을 선물하고 싶었다. 노년의 부부(자료사진).
픽사베이
지난해 12월, 엄마 생신 선물로 용돈을 송금하려다 말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현금도 꽤 괜찮은 선물이긴 하지만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선물은 없을까? 근처에 살았다면 근사한 식당에 가서 맛있는 식사도 하고, 유행하는 겨울 코트도 하나 사드렸을 텐데 이런 소소한 일을 생신 때 할 수 없으니 아쉬운 마음은 당연히 따라왔다.
선물로 드릴 수 있는 것을 고민하기 전, 나라는 사람이 엄마에게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면 좋을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내 마음도 들여다봤다.
나를 통해 엄마가 무엇을 얻으면 좋을지, 무엇을 느끼기를 바라는 지도 생각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머릿속에 가득했던 희뿌연 안개가 걷히고 맑고 높은 가을 하늘 같은 배경이 펼쳐졌다.
엄마에게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다. 사는 게 갑갑하고 막막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우고 느끼는 데 주저하기만 한 엄마에게 새로운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쓸모없다고 여기는 엄마의 감각을 조금이나마 깨워주고 싶었다. 내가 선물한 '시간'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고 무뎌진 엄마의 감각을 일깨울 수 있다면 참 괜찮은 선물이 아닐까.
주변을 돌아보면 쉰이 넘어가는 인생 선배들은 다들 제2의, 제3의 인생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금전적인 노후 준비와 함께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도전하고 싶은 것을 잘 버무린 인생 전반의 노후 준비를 위해 분주하다. 그들을 보며 나의 노후를 준비하는 미래의 나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즈음 막다른 벽을 느꼈을 엄마를 떠올리는 경우가 더 많다.
예상하지 않은 엄마의 중년, 그럼에도 잘 버티고 있다
엄마가 서른넷에 낳아 키운 막냇동생은 엄마가 쉰넷이 된 봄에 장애를 얻었다. 쉰넷, 어릴 때 그 나이를 생각하면 노인 같았는데... 40대에 들어선 지금 내 나이에서 보면 여전히 뭐든 해볼 만한 나이다.
그때부터 엄마는 재활병원에서 동생과 살다시피 했고, 동생을 일으켜 세우고 걷게 하기 위해서 앉아서 편히 쉴 몸과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간 동생을 돌보며 엄마의 노후 준비는 산산이 부서지는 파도처럼 사라졌다. 살아낼 오늘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엄마는 친구, 지인들과 과거처럼 자주 교류하지 않는다. 엄마는 티브이를 보다 웃긴 장면에서 잠깐 웃다가도 자식이 힘들어하는데 이렇게 웃어도 되냐며 자책한다. 엄마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즐거운 일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한다. 엄마의 자식 하나가 덜 행복하게 살고 있기에 엄마도 불행해야 한다고 여긴다.
엄마는 그녀의 취향을 찾을 겨를도 없었고, 꿈꾸는 노후를 그리지도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 하는 유행을 좇아가지도 못했다. 스스로 만들어낼 에너지도, 심적 여유도 없이 바스락거리는 낙엽처럼 말라갔다.
봄이 오면 겨우내 옹송그린 나무줄기에 물이 차오르고, 묵직한 흙을 뚫고 올라온 새싹이 낯을 보여주고, 축포를 터뜨리듯 꽃송이들이 만개한다. 그렇게 차오르는 생명력을 눈으로 확인하듯 엄마의 몸에도 새로운 기운이 감도는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일흔을 내다보는 엄마에게 필요한 '시간'
그리하여 엄마 생신 선물로 '맘마미아' 뮤지컬 티켓을 예매했다. 엄마, 아빠 두 분이 단정하게 차려입고 공연장에 가서 티켓 수령도 직접 하고, 뮤지컬을 관람하러 온 사람들을 구경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뮤지컬 내내 아바(ABBA)의 노래에 손뼉을 치고 어깨춤을 추며 세상 근심 모두 날려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부모님의 발걸음을 상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