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민주열사희생자 고 박성은 열사
김선재
비극은 1990년 4월 9일 시작됐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열사는 육군 제31사단 사단직할 11병참선 경비대대에 입대합니다. 광주 향토사단인 31사단은 5.18 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으로 광주에 투입되기도 했던 부대입니다.
열사가 입대한 당시 그 부대는 군기가 엄하고 훈련 강도가 높은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요. 단기사병이었던 열사는 5월 7일부터 19일까지 소요진압훈련인 충정훈련과 총검술 교육훈련을 받았습니다. 입대 전 사회과학 지식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너무나도 괴로운 심정이었습니다. 5.18을 기념하는 주간에 집회나 시위를 진압하는 훈련을 받는 부담감이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열사는 훈련과정에서 조교들로부터 집중 구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조교들은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군홧발로 걷어차 사람을 넘어트렸습니다. 훈련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훈련병들을 총 개머리판을 무자비하게 가격했습니다. 박성은 열사는 특히나 다른 훈련병보다 체력이 약해서 훈련에 뒤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친구들에게 "조교로부터 구타를 당해 가슴에 멍이 들어 기침을 하면 가슴이 저린다. 죽고 싶다"는 얘기를 하며 괴로움을 토로할 정도였습니다.
사병들 간에 구타와 폭력을 제재해야 할 간부들은 부대 관리에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훈련교관 배 아무개 중사는 당시 지시받았던 알몸 검사를 1년에 2회만 실시할 정도로 근무 태만이 심각했습니다. 알몸 검사를 통해 구타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던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심지여 박성은 열사 기수 때는 아예 검사를 실시하지도 않았고, 훈련장에서 20~30분 형식적인 교육만 하고 사라졌습니다.
대대장과 정작과장에게는 훈련 교관과 조교들을 지도 감독할 의무가 있었는데요. 두 사람 모두 전역을 앞두고 취업 준비에 정신이 팔려있었습니다. 상부 업무지시로 운영했어야 할 '고충신고제도' 역시 제대로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박성은 열사는 거듭되는 구타와 폭력에 마음이 무너져 갔는데요. 사망 직전인 1990년 5월 10일 일기에는 "인간적인 면을 상실한 욕설도 함께 해서 서글픈 면들뿐이다"고 기록했습니다. 열사는 주로 친구들을 만나 고충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는데요. 군에 입대해 교육을 받으며, 집회나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는 괴로움도 토로했습니다.
"지금 금남로에 있는데 어제 태권도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고 디지게 맞았다. 그래서 부대에 가기 싫다."
"어제 태권도와 총검술 자세가 나오지 않아 가슴을 맞고 철모를 쓴 채 머리를 구타당해 아프다. 조교가 오늘 출근해 자세가 나오지 않으면 군대 구타가 무엇인지 보여준다는 위협을 했다."
단기사병으로 복무하던 열사는 거듭되는 폭력과 가혹행위를 피하고자 5월 15일 부대로 출근하지 않았는데요. 이날 부대 내에서 발생한 비인간적이고 비민주적인 행태를 고발하는 문건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그날 오후 곧바로 사단 헌병대 군탈계로 잡혀갔는데요. 5월 17일 소속 부대는 징계위원회에서 '출근 미귀 사실에 대한 지시불이행'으로 영창 7일 징계를 내립니다.
군대 내 민주화 이끈 열사의 저항
5월 23일 낮 12시 상무대 영창에서 퇴창 후 오후 6시 40분 경 자택으로 귀가했는데요. 오후 7시 30분 경 고등학교 동창과 만나기로 하고 집을 나선 후, 밤 10시 경 친구와 헤어진 다음 약 8시간 동안 행적은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사체를 처음 발견한 어머니는 "신체상 외상은 없었고, 사체 주변에 구토물, 농약병, 냄새 등도 없었으며, 놀이터 모래 바닥에 하늘을 향한 채 반듯이 누워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신고를 받고 출동한 헌병대는 사체 주변에서 구토물을 수거했고, 감정 의뢰 결과 치사량 유기인제류가 검출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음독사 물증인 농약병 등이 사체 발견 장소에 없었고, 집 근처 농약상회와 청소미화원 등을 상대로 농약병 수색을 했지만 결국 물증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고 현장에서 구토물을 수거했다던 헌병대 수사관은 "구토물을 수거하면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고 했으나, 수사 기록에서 해당 사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체를 검안한 사단 군의관도 문제가 있었는데요. 부검을 해야만 알 수 있는 "폐부종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이라는 내용을 잘못 기재하는 등 사체검안서 역시 부실했습니다.
초기 부실한 수사과정으로 인해 열사의 죽음은 오랫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습니다. 의문은 결국 2004년 6월 14일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결정으로 해소됐습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열사의 죽음을 저항으로 판단했습니다. 인권침해와 비민주적인 부대운영 그리고 시위진압 훈련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며 생명을 포기했다고 밝혔는데요. 열사의 희생 이후 군 내 민주화에 노력을 기울이게 됐고, 실제 열사가 소속된 부대의 전입신병 교육이 폐지되고 가혹한 구타와 가혹행위가 근절되는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열사의 죽음은 기본권을 침해한 국가에 대한 항거이며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죽음이었습니다.
2018년 7월 국방부는 열사의 사망을 순직으로 결정했고, 2023년 11월 1일 열사는 대전현충원 충혼당에 모셔질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