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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 개승만이가 일을 많이도 했다" 학살 피해자 유족의 탄식

구자환 감독, 책 <빨갱이 무덤> 펴내 ... 한국전쟁기 창원·함안 등 민간인 학살 기록

등록 2024.05.09 09:44수정 2024.05.0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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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환 다큐감독이 경남지역 민간인 학살을 다룬 책 <빨갱이 무덤>을 펴냈다. ⓒ 윤성효

 
"아따, 개승만이가 일을 많이도 했다. 개승만이가 수장해야지, 또 매장해야지, 이 일을 얼마나 많이 했노."

창원마산 진전면 여양리 민간인 학살지에서 나온 유골을 본 유족 성증수 할머니가 분통을 터뜨리며 했던 말이다. 구자환 다큐감독이 최근 펴낸 책 <빨갱이 무덤(레드툼)>(도서출판 '삶창' 간)에서 소개한 내용이다. 


<민중의소리> 기자를 지낸 구 감독은 민간인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툼>, <해원>, <태안>에 이어 제작 중에 있는 <장흥 1950>을 다루면서 알게 된 아픈 역사를 320여쪽의 책에 담았다. 

여양리 민간인 학살지는 2002년 8월 태풍(루사) 때 토사가 유출되면서 무연고 유골이 다량 발견됐다. 억울하게 떼죽음을 당한 지 반세기가 지나 피학살자들이 마치 '나 여기 있소'라고 하듯, 폐광과 너덜겅에서 유골이 나온 것이다.

고 이상길 경남대 교수가 2004년 수습한 유골은 180~200여구였다. 이들은 진주지역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들이었고 재판 등 절차도 없이 국군에 의해 학살 당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발굴 현장을 취재했던 구자환 감독은 수습된 유골을 본 성증수 할머니가 "아이고, 어디 가서 이 한을 풀꼬"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태풍으로 드러난' 여양리 학살 현장은 책에서 "하늘도 무너지고 땅도 꺼지던 그 해 6월"이라는 제목으로 담겨 있다. 성증수 할머니가 언급했던 '개승만'은 이승만을 뜻한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단지 '빨갱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좌익이 뭔지도 모르고 가입하라고 해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불려나가 학살당했다는 증언은 이 책 전체에 걸쳐 되풀이된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한국전쟁 전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음을 이 책은 고발하고 있다.


"진주 사봉면 대곡리 이혜기 할머니도 당시 스물한 살이던 남편을 잃었다. 남편은 좌익이 무엇인지 우익이 무엇인지 몰랐다. 동네 사람들이 한번 가 보자고 해서 갔던 길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그 일이 비극이 될 줄 몰랐다. 남편은 1950년 음력 6월 1일 동네 사람들과 회의하러 간다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학살의 방법이나 희생자의 처리 방식도 충격적이다. 동네 주민들에게 희생자들을 매장하게 하거나 아예 수장하기도 했다. 창원마산 진전 앞 괭이바다가 대표적 수장지다. 수장된 희생자들의 시체가 대마도까지 떠내려 간 경우도 있었다.

"연좌제 때문에... 기나긴 2차 가해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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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환 감독이 펴낸 책 <빨갱이 무덤>. ⓒ 도서출판 삶창

 
"한국전쟁 당시 마산형무소에서 전차 상륙함(LST)을 타고 괭이바다에서 학살된 민간인 일부의 시신은 해류를 타고 일본 대마도(쓰시마)로 떠밀려갔다. 거제도 지심도 인근에서 수장된 이들과 부산형무소에서 갇혀 오륙도 앞바다에서 수장된 이들 일부도 대마도로 떠내려갔다. 이보다 앞서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 관련자로 추정되는 이들도 시신이 되어 대마도 해안에 떠올랐다."

구 감독은 "목 잘린 남편"(함안), "백지에 찍은 도장"(창녕), "아들과 함께 묶일 걸"(진주), "학살의 대지에 비가 내리고"(산청), "그 사람들 살려주었으면 어떻겠노"(의령), "학살이 자행된 섬에는 뱀만이 들끓었다"(사천), "억울하게 죽은 사람만 억울하지"(통영), "통곡의 섬 거제도"(거제)라는 소제목을 달아, 경남지역 곳곳에서 자행되었던 민간인 학살 현장과 증언, 그리고 뒤늦게 밝혀진 사실들을 기록해 놓았다.

'빨갱이 무덤'의 아픔은 후대에까지 이어졌다. 바로 '연좌제' 때문이었고, 기나긴 '2차 가해의 시간'이기도 했다. 또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군사정권을 거치는 동안 억울한 죽음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은폐되기도 했다.

"잠시 먼 산을 응시하던 할머니는 체념한 듯 우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옛날에는 이 일을 말하지도 못했고, 이 일을 묻고 다니다 가는 잡혀갔을 것이라고 했다. 좋은 세상이 왔지만, 할머니는 겁이 난다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무엇 때문에 겁이 나느냐고 내가 물었다.

'해나(행여) 또 돌아올까 싶어서. 옛날 세상 돌아올까 싶어서 겁이 나는 거라. 아직까지 남북이 안 갈려 있는교. 갈려 있는데 겁이 안 날 턱이 있나. 겁이 나는데.'"


구 감독이 의령지역 민간인 학살 현장을 소개하며 전한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단지 멈추고 있는 상태다.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다시 남북간의 전면전이 발생하면 과거처럼 학살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할머니의 말대로 학살은 반복될 것 같았다"라고 썼다.

"마을 사람들은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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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에 있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현장 안내 깃발. ⓒ 윤성효

 
구 감독이 듣고 전한 학살 현장의 아픔은 지금 시각으로는 상상을 초월한다.

"학살 현장에는 절명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세 명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어깨에 총을 맞고 마을로 내려와 지서로 가서 자수했다. 그가 왜 도망가지 않고 자수했는지 동네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어리석고 순박한 사람이라고 탄식만 했다. 지서 순경은 그날 일꾼을 시켜 산모퉁이에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를 총살하고 묻었다."

"보도연맹 회의에 참석한 마을 사람들은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마을에는 이장과 몇 사람의 남자들이 남아 있었다.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소집을 피했던 사람들은 살아남았고, 멋모르고 따라나선 사람들이 죽었다. 어떤 집안은 두 명의 형제가 동시에 죽었다. 형이 회의에 간다고 나서는 것을 본 동생은 자기도 구경할 것이라며 따라갔다가 죽었다."

"이들이 마산 앞바다에서 학살된 이후 구산면 옥계, 심리, 난포리 앞바다에는 한 데 묶인 사람들이 시신이 되어 떠올랐다. 당시 이현규 씨는 안녕마을 큰골 해안에 떠오른 시신을 매장했다. 선주였던 그는 선원을 시켜 산자락 끝에 드러난 땅에 묻도록 했다. 선원들은 괭이로 흙을 파서 8구의 시신을 해안에 묻었다."

"'치가 떨리고… 뭐 사상죄로 뭔 일이 있어야 죽든가 죗값을 받지. 그 아무것도 아닌데, 그 당시 좌익 우익하던 그땐데 아무 명칭도 없는데… 그 당시 활동한 사람은 다 살았다 아이가.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은 다 죽었는데. 안 죽고 살은 사람은 진짜 사상적으로 뭘… 그때 레닌 막슨가… 그 뭐 좋다고 이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도 안 죽었다. 다 나왔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그냥 농촌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만 전부 다 죽인 거라. 끌려 와가지고…

그의 눈 주변이 붉어져 있었다. 억울해서 말만 하면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먼저 나온다고 했다. 그의 칠촌 아재도 형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이념이 무언지도 몰랐다. 남의 집 일만 하고 살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남편의 죽음에 목놓아 통곡하던 배우자들은 경찰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제목을 <빨갱이 무덤>으로 지은 이유에 대해 구자환 감독은 "'당신들이 빨갱이라고 죽인 사람들이 누구인지 봐라'고 항의를 하기 위해서다. 다른 하나는 한국 사회에 만연하는 레드 콤플렉스를 없애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빨갱이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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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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