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일씨가 과거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서의 일부. 구속영장이 발부되기 2개월여 전부터 감금되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변상철
실제 법원에서 최창일씨의 재심이 이렇게 늦어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두 가지 면에서 최창일씨의 재심 사유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첫째는 민간인을 수사할 권한이 없는 보안사가 당시 민간인이었던 최창일씨를 수사했다는 점이다. 이미 보안사 민간인 수사는 재심에서 무죄가 난 판례가 수십 건이 넘는다. 둘째는 약 2개월 넘는 기간 불법감금 당한 채 보안사의 수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영장도 없이 불법 감금 당한 채 민간인을 수사한 것이 기록상 명백하기에 신속한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질 것으로 보았다.
이에 더해 과거 재판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증거도 추가로 제출했다. 최창일씨가 북의 지령을 받기 위해 북한을 왕래했다며 그 증거로 당시 보안사는 북한으로 이동했다는 시간을 수사 기록에 정리해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실제 이 당시의 교통시간을 입수해 확인한 결과 보안사가 주장했던 북한으로의 이동 시간이 맞지 않았다. 또 최창일씨를 포섭했다는 북한공작원 신 아무개씨 역시 조총련계 공작원이라는 발표와는 달리 조총련 명단에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렇게 명백한 재심 사유와 증거가 있는데도 법원의 재심 개시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결국 재심 신청을 한 지 4년여 가까운 시간이 흐른 2023년 11월 16일에야 재심 개시가 결정되었다.
재일교포 조작 간첩 재심 사건은 당사자가 이미 사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재심 재판을 이어가는 것은 당사자가 아닌 유족인 경우가 많다. 최창일씨 사건도 당사자가 아닌 딸 최지자씨가 재판에 참석했다. 재판 때마다 최지자씨가 한국을 왕래해야 하는 시간적, 금전적 부담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또 재판 기간 법정에서 기소를 유지한 채 최창일씨를 피고인으로 지목하는 검찰의 태도를 지켜보는 것도 유족으로선 힘든 일이다. 결국 재판이 길어질수록 그 과정에서 유족은 또 다른 피해를 입는 셈이다.
최지자씨는 재일교포라는 차별에 더해 부친 최창일씨의 조작된 범죄 사실로 인해 일본 사회에서 말로 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당하며 살았다고 했다. 특히 부친의 일로 친오빠가 받은 차별과 어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검찰과 군은 묵묵부답... 제대로 사과 안 하나
무죄 선고 전인 5월 16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고 최창일씨가 보안사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되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 결과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보안사가 69일 동안 불법 구금하고 혐의 사실 입증을 위해 가혹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다. 또 불법 수사로 고 최창일씨가 임의성 없는 진술을 한 것을 알았는데도 검찰이 최창일씨를 기소해 국민의 인권을 보호할 공익의 대표기관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고, 법원 역시 불법 수집된 증거를 채택해 인권 보호 최후 보루 기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결정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마지막으로 재심 등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이미 최창일씨의 유족은 4년 전 재심을 신청한 상태였고,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 소식이 날 때는 이미 재심이 수 개월간 진행된 상태였다. '국가의 재심 등 조치'라는 권고 표현은 다른 결정문에서 대부분 인용되는 표현이다. '적절한 조치'라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가 1기 진실화해위원회 이후로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이뤄진 적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오히려 '적절한 조치'라는 표현보다 해당 기관장들의 언론보도 등을 통한 명백한 사과와 신속한 검찰의 국가배상조치, 검찰의 즉각적 직권재심, 법원의 신속한 재심 재판 등의 구체적 절차를 권고해야 한다. 그리고 그 권고 사항이 제대로 이행되는지 늘 감시하고 지적해야 한다.
특별히 재판부는 판결 선고에 앞서 모두 발언에서 "그(최창일)는 50여 년 전 조국으로 건너와 꿈을 펼치려던 재일한국인 청년으로, 간첩으로 확정되는 동안 중대한 인권침해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기본권 보장의 최후의 보루가 되어야 하는 사법부의 임무를 소홀히 하였다. 과거의 판결을 바로 잡는다 하여 피고인과 피고인 가족의 고통이 쉽게 회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판결로 인해 가족에게 조금의 치유와 위로가 되길 바란다. 사법부의 일원으로 깊은 사과를 드린다"라며 최씨 가족에게 사과했다.
판사의 판결 전 발언과 마찬가지로 "무죄 선고가 최창일씨와 그 가족이 받은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피해자의 사법적 회복을 위한 한걸음을 떼었을 뿐이다. 최창일씨 가족은 법원의 사과와는 별도로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며 지금까지 공소를 유지해 왔던 검찰과 실체 없는 근거로 최창일씨를 불법 수사한 보안사(현 국군방첩사령부)가 사과하길 바라고 있다.
앞으로 무죄가 선고된 재심 사건에 대해 검찰은 상고를 포기하는 것으로 유족에게 조금이나마 사죄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늦어진 진실 규명과 명예회복 만큼이나 충분하고 완전한 반성과 사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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