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 선고 이후 환한 미소로 이야기 나누는 김성대 씨
이건희
"기쁘죠. 기쁘기는 한데 내 청춘은 다 사라졌는데..."
24일 오후 2시 서울지법 318호. 김성대씨의 반공법 위반 사건 등에 대한 재심(2023재노8)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그는 아쉬움의 한탄을 내뱉었다. 1974년 인천 부평경찰서에 연행되어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은 지 50년 만에 어렵사리 진실은 밝혀졌지만, 이미 그의 청춘은 흘러가 버린 뒤였기 때문.
김씨는 지난날 국가로부터 두 번 버림을 당해야 했다. 한 번은 15살 때였다. 가난한 가정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1971년 오징어 배를 탔다가 납북되어, 다음 해인 1972월 9월 7일 북한의 억류에서 풀려났지만, 수십 일간 속초경찰의 고문을 받고 반공법 위반자가 되어야 했다.
그 뒤로 고향 고성을 떠나 인천에서 잠시 선원 생활을 하다가, 1974년 11월 재차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유도 모른 채 연행되어 또다시 수십일 간의 조사를 받고 법정에서 선 김씨는, 반공법 위반 등으로 징역 단기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해야 했다. 그가 위반한 범죄 사실은 북한에서 억류되었을 당시 북한 당국에 포섭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북한을 찬양했다는 점이다.
김씨는 두 번의 재판으로 보안사범 전과자로 살아야 했다.
"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죠. 어딜 간다 하면 (수사관들이) 쫓아다니고, 감시하고, 주변 사람들 괴롭히고... 직장 다닌다 하면 직장을 쫓아오니 사장이 그만두라고 하니 어떻게 살아요? 죽을 생각도 몇 번이나 했다니까."
'보안관찰' 대상자였던 김씨는 거주제한, 이동제한, 직업제한 등의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 생활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납북되었다가 온 사실만으로 자신이 모두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저 자신이 잘못해서, 팔자가 사나워 생긴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아, 납북됐을 때 160명 중에 수용소 탈출했던 사람은 나 밖에 없었어요. 귀환되고 나서 재판받는데 판사가 탈출하려고 한 사람이 있느냐고 묻길래 내가 손을 들었지. 그래도 소용없어요. 그때는 무조건 잡아넣는 거야. 그리고는 나중에 또 잡아가. 이게 나라냐고..."
다행히 김씨는 2023년 5월 12일 춘천지방법원에서 납북 귀환된 사건에 대해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난 납북되었다가 온 사실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처음에 같이 잡혀갔다 온 사람들이 재심하자고 하길래 싫다고 했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데 무슨 재심이냐고. 그래도 여러 사람들이 재판을 한다니까 자식, 손주 생각도 나고 해서 나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재심을 받아보니 두 번째 처벌 받은 것도 억울한 거야. 그래서 인천에서 재판 받은 것도 같이 재심을 하기로 했죠."
재심을 시작하기 위해 인천지방검찰청에 보관되어 있던 1974년 수사, 공판기록을 받아 살펴보던 중 명백한 재심사유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