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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기록, 다른 판결... 김성대씨의 잃어버린 50년

납북 귀환 어부 김씨, 반공법 위반 재심에서 무죄 선고 받아... "내 청춘 다 사라졌는데"

등록 2024.05.24 17:15수정 2024.05.24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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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죄 선고 이후 환한 미소로 이야기 나누는 김성대 씨
무죄 선고 이후 환한 미소로 이야기 나누는 김성대 씨이건희
 
"기쁘죠. 기쁘기는 한데 내 청춘은 다 사라졌는데..."

24일 오후 2시 서울지법 318호. 김성대씨의 반공법 위반 사건 등에 대한 재심(2023재노8)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그는 아쉬움의 한탄을 내뱉었다. 1974년 인천 부평경찰서에 연행되어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은 지 50년 만에 어렵사리 진실은 밝혀졌지만, 이미 그의 청춘은 흘러가 버린 뒤였기 때문. 

김씨는 지난날 국가로부터 두 번 버림을 당해야 했다. 한 번은 15살 때였다. 가난한 가정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1971년 오징어 배를 탔다가 납북되어, 다음 해인 1972월 9월 7일 북한의 억류에서 풀려났지만, 수십 일간 속초경찰의 고문을 받고 반공법 위반자가 되어야 했다.

그 뒤로 고향 고성을 떠나 인천에서 잠시 선원 생활을 하다가, 1974년 11월 재차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유도 모른 채 연행되어 또다시 수십일 간의 조사를 받고 법정에서 선 김씨는, 반공법 위반 등으로 징역 단기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해야 했다. 그가 위반한 범죄 사실은 북한에서 억류되었을 당시 북한 당국에 포섭되어 한국으로 돌아와 북한을 찬양했다는 점이다.

김씨는 두 번의 재판으로 보안사범 전과자로 살아야 했다.

"뭐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죠. 어딜 간다 하면 (수사관들이) 쫓아다니고, 감시하고, 주변 사람들 괴롭히고... 직장 다닌다 하면 직장을 쫓아오니 사장이 그만두라고 하니 어떻게 살아요? 죽을 생각도 몇 번이나 했다니까."

'보안관찰' 대상자였던 김씨는 거주제한, 이동제한, 직업제한 등의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 생활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납북되었다가 온 사실만으로 자신이 모두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저 자신이 잘못해서, 팔자가 사나워 생긴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아, 납북됐을 때 160명 중에 수용소 탈출했던 사람은 나 밖에 없었어요. 귀환되고 나서 재판받는데 판사가 탈출하려고 한 사람이 있느냐고 묻길래 내가 손을 들었지. 그래도 소용없어요. 그때는 무조건 잡아넣는 거야. 그리고는 나중에 또 잡아가. 이게 나라냐고..."

다행히 김씨는 2023년 5월 12일 춘천지방법원에서 납북 귀환된 사건에 대해 재심을 통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난 납북되었다가 온 사실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처음에 같이 잡혀갔다 온 사람들이 재심하자고 하길래 싫다고 했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데 무슨 재심이냐고. 그래도 여러 사람들이 재판을 한다니까 자식, 손주 생각도 나고 해서 나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재심을 받아보니 두 번째 처벌 받은 것도 억울한 거야. 그래서 인천에서 재판 받은 것도 같이 재심을 하기로 했죠."

재심을 시작하기 위해 인천지방검찰청에 보관되어 있던 1974년 수사, 공판기록을 받아 살펴보던 중 명백한 재심사유가 드러났다.
 
 1974년 11월 부평경찰서에서 작성한 김 씨 피의자신문조서의 일부. '11월 13일' 연행되었음이 기재되어 있다.
1974년 11월 부평경찰서에서 작성한 김 씨 피의자신문조서의 일부. '11월 13일' 연행되었음이 기재되어 있다.변상철
   
 1974년 12월 작성한 인천지청의 피의자신문조서. 이 조서에도 역시 김 씨가 '11월 13일' 연행되었음이 기재되어 있다.
1974년 12월 작성한 인천지청의 피의자신문조서. 이 조서에도 역시 김 씨가 '11월 13일' 연행되었음이 기재되어 있다.변상철
 
먼저 부평경찰서의 연행 기록이었다. 부평경찰서 사법경찰관이 1974년 11월 29일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에 김씨는 자신의 연행에 대해 '1974년 11월 13일경 속초항에서 부평경찰서 직원에게 체포되었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

또한 같은 해 12월 6일 서울지방검찰청 인천지청에서의 피의자신문조서에도 '저는 1974. 11. 13. 09:00경 속초항 매형의 어선 유성호에서 잠을 자다가 경찰관에게 검거되었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김씨가 1973년 11월 13일 연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속영장은 1974년 11월 17일에야 발부되었다. 이는 형사소송법상 긴급구속이라 하더라도 48시간이 경과되기 전에 구속영장이 발부되어야 함에도 그렇지 않았기에 '불법구금'된 상태로 조사받은 것이 확인된 것이다.

또한 김씨가 주변 사람들에게 북한을 찬양했다는 사실 역시, 북한에 납북되어 억류되어 있을 당시 북한 당국자들에 의해 강제 산업을 시찰하거나 금강산 관광 등에서 본 경관, 음식의 종류 등의 내용을 이야기 한 것이었다.

50년이 흘렀지만,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오히려 이번 재심을 통해 아쉬운 점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이번 재심은 특별한 증거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과거 50년 전 경찰의 수사기록과 검찰의 수사기록을 제대로만 살펴봤어도 김씨가 명백하게 '불법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받았던 점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50년 전 재판부 역시 같은 기록을 보았던 것으로, 불법감금을 통해 임의성 없는 자백으로 작성된 피의자신문조서란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오늘 재심 재판부는 임의성 없는 자백이라며 과거의 경찰, 검찰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거의 재판부는 왜 같은 판결을 내리지 못했는가? 과거의 사법부와 현재의 사법부의 '공정'이 다를 수 없지 않은가?

검찰과 법원은 과거 피고인의 주장을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았고, 결국 김씨는 수십 년간 인권침해의 피해를 당하며 살아야 했다. 검찰과 법원은 이제라도 피해자 앞에 반성하고 사죄해야 한다. 검찰과 법원은 시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마지막 보루이다. 시대와 권력 앞에 공정함의 판단이 달라진다면 사법부의 신뢰는 시민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무죄선고 직후 환하게 웃고 있는 김성대 씨와 가족
무죄선고 직후 환하게 웃고 있는 김성대 씨와 가족이건희
 
오늘 무죄 선고 후에 환하게 웃으며 속초로 돌아간 김씨와 그의 가족은 당연한 일상을 되찾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더 늦지 않도록 국가는 피해자를 위로하고 국가배상과 보상에 적극 임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변상철씨는 공익법률지원단체 '파이팅챈스' 국장입니다. 파이팅챈스는 국가폭력, 노동, 장애, 이주노동자, 군사망사건 등의 인권침해 사건을 주로 다루는 법률 그룹입니다.
#파이팅챈스 #FIGHTINGCH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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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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