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중원전자 부도나고 고용안정 싸움을 할 때(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조귀제).
조귀제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하기로 마음먹은 조귀제는 졸업도 하지 않은 채, 1987년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을 한다. 당시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되던 시기다. 조귀제가 입사한 중원전자에서도 파업을 했다. 그때 외친 구호는 "빨간 날은 우리도 쉬게 해 줘!", "화장실 갈 때는 허락 안 받고 갈 수 있게 해 줘!"였다.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파업을 했다. 그리고 노조를 만들기로 했다. 노조 설립 서류를 갖고 있던 간부들이 회사 봉고차에 납치되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조귀제와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은 조직 활동을 시작했고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날, 드디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회사가 만들어진 후, 저희가 처음으로 노동조합을 만든 거예요. 전축 만드는 자제를 주문 생산하는 OEM 회사였어요. 전체 직원은 600명 정도 됐어요. 조합원은 제일 많았을 때가 490명까지 됐었죠. 91년까지는 공장이 잘 돌아갔어요. 그런데 구로 공단이 90년대에 들어서 산업 합리화(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생산성의 상승에 의하여 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이윤의 증대를 꾀하는 일) 되고 공단 자체가 없어지기 시작해요. 결국 우리 회사도 92년도에 부도가 났어요. 그리고 고용안정투쟁을 3년 정도 하다가 마무리했어요. 노조도 정리했고요. 그런데 저희는 회사가 문을 닫아 집단해고된 거니까 국회와 노동청 앞에 가서 고용안정을 보장하라면서 싸웠어요."
조귀제는 1987년부터 1995년까지 8년 동안 구로 공단 노동자로 살았다. 중원전자 노동조합 선전부장과 사무국장을 맡았다. 위장 취업한 것이 들통나서 구속이 되기도 했다. 구속 이유에는 국가보안법 위반도 있었다. <노동자의 철학>이라는 책을 봤다는 것이 이유였다. 집회에 참여했다고 집시법 위반을 적용했고,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연대했다고 제3자 개입금지 법을 적용했고, 회사 들어갈 때 신분증을 위조했다고 공사문서 위조법을 적용했다.
조귀제가 위와 같은 죄목으로 재판을 받는 날, 조합원들은 버스를 꽉 채워서 방청을 하러 왔다. '조귀제는 위장취업을 했지만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서 탄원서를 제출하고 감옥 밖에서 같이 싸웠다. 그 덕분에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회사는 본명으로 재취업하면 받아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조귀제는 고용이 승계되었다. 당시 노동조합의 힘이 그만큼 셌다는 방증이다.
"노조가 없었다면 고용승계도 힘들었을 거예요. 처음에 현장에 갔을 때, 석 달을 버티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어요. 학생운동 할 때는 피의 맹세까지 하면서 이 세상을 바꾸자고 한 친구들이 구로공단에 취업하고 한 달을 못 버티고 보따리 싸서 나갔어요. 현장이 그만큼 힘들었어요. 매일 납땜을 했거든요. 마스크도 안 쓰고."
조귀제는 자신을 성장 시킨 계기는 그때였다고 한다. 고생은 했어도 '잘 선택한 길'이라고 했다. 하지만 학생운동을 하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감옥에 간 조귀제를 본 언니는 말한다.
"네가 그때 서울에 안 가고 진주 교대에 가서 선생님이나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내성적이고 차분했던 조귀제가 학생운동을 하고 노동운동을 하리라고 생각지 못한 사람은 식구들 뿐만이 아니었다. 친구들도 그랬다. 동창회 한다는 연락을 받아도 세상 바꾸는 일 하느라 바빠서 못 간다고 하면 어느 정도 통했다. 그래도 한 번은 안 갈 수 없어서 갔다. 삼십 년이 넘게 흘렀어도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은 금세 얼굴을 알아본다.
"제가 겉으로 보기에는 남의 말 잘 들어주고 다정다감한 것 같지만 속은 무척 냉정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별명이 '년꽃다발'이에요. 미친년 꽃다발의 줄임말이죠. 학생운동 할 때 친구가 지어줬어요. 무언가에 한번 꽂히면 정신없이 빠져들고 다른 건 안 본대요. 그리고 시베리아 벌판에 내놔도 죽지 않고 살아날 거래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라고도 하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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