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밀 한양대 교수
주간함양
"진부한 문체, 상투적인 글을 거부하고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했던 독보적인 문장가", "정해진 길, 정해진 틀에서 일탈해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선 경계인". 박수밀 한양대 교수는 연암 박지원 선생을 이 두 문장으로 표현했다.
이에 볼 수 있듯이 연암 박지원 선생은 특출난 글쓰기 능력만큼이나 당대 독특한 생애를 보냈다. 이러한 생애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들은 현 시대에도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가진다.
실학을 뛰어넘어 고전문학에 자랑스러운 유산이자 별인 연암 박지원 선생을 새로이 기리는 길을 찾아 나서기에 앞서 그의 삶과 문학세계를 두 편에 걸쳐 전반적으로 되짚어보고자 한다. 지난 4월28일 서울 서초구의 한 카페에서 연암 박지원 선생의 문학과 사상을 오랫동안 탐구해오고 있는 박수밀 교수를 만나 많은 도움을 받았다.
우울증과 연대의 공동체
연암 박지원 선생은 1737년에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연암(燕巖)이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삶과 평소 언행은 그의 아들 박종채가 기록한 <과정록(過庭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어릴 적엔 <사기(史記)>를, 장년에는 <장자>, <불교>를 섭렵함으로써 성리학에 국한되지 않는 다양한 학문을 접해왔다.
연암 박지원 선생의 삶에서 특이한 부분 중 하나는 거침없고 다혈질인 태양인의 기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10대 후반 수년간 불면증을 동반한 우울증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사실 현대인에게는 아주 흔한 질병이지만 당시대에는 찾기 힘든 질병이라 할 수 있다. 박수밀 교수는 이 연암 박지원 선생이 겪은 우울증은 현대에 겪는 우울증과는 성질이 다르다고 강조한다.
"현대인들의 우울증은 대개 일이 잘 안 풀리거나 관계에 큰 상처가 있거나 어떤 물질적인 큰 어려움을 겪는 등 개인적인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연암은 아름다운 공동체와 같은 자신이 꿈꾸는 세상이 있었는데 세력과 명예 그리고 이익만 따져서 돌아가는 현실에 깊은 좌절 의식을 느꼈고 그것에 비롯된 우울증이라 할 수 있다. 이 젊은 시절의 우울증이야말로 연암 문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삶의 본질을 이해하고 주변의 인간과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자양분이 됐다."
이후 20대와 30대 시절에는 백탑(白塔, 지금의 탑골공원) 부근에서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 18세기 후반 이용후생(기구를 편리하게 쓰고,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함)의 학자들과 어울린다. 같이 어울리는 학자들을 살펴보면 서얼들이 많았고 나이 차이도 현격했다. 연암은 사대부 집안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분과 나이 차이를 따지지 않고 뜻과 지향이 맞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우정과 학문의 연대의 공동체를 이뤄갔다.
박 교수는 "혼자 생각하면 혼자만의 생각에 그치지만 열 사람이 같이 생각을 나누면 그 열 사람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기 때문에 이런 우정의 연대라고 하는 것이 연암의 사유를 깊게 하는 데 굉장히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44살 때인 1780년에는 반당의 신분으로 중국의 열하를 여행하는데 그 조선 사신 역사상 최초의 경험이 <열하일기>라는 명편을 낳게 된다. 중국의 북경에 갔을 때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견문기인 <열하일기>는 오늘날에도 학술 서적으로서뿐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열하까지 가는 길은 굉장한 고생길이었지만 최고의 문학서를 낳게 한 결정적 기회가 된 것이다. 이 <열하일기>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조금 더 다루기로 하자.
짧은 벼슬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