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병장 정연관의 묘 (장병 1묘역 103-3230호)
임재근
끝으로 장병 1묘역 103-3230호에 정연관 열사가 안장돼 있습니다. 1966년 12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정연관 열사는 대구 남산국민학교, 경구중학교, 포항 성광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대구 계명대학교 정문 앞에서 액세서리 점포인 '선물의 집'을 성실하게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1985년 계명대학교 총학생회는 5.18민중항쟁 기념 기간을 정해 사진 전시와 비디오 상영을 했습니다. 이때 정연관 열사는 마침 계명대에 재학 중이던 중·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한 동아리에서 5.18 민중항쟁 비디오를 보게 됐습니다. 이후 열사의 마음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됐고, 주변에 자기가 가진 정치 소신을 밝히는 데 거리낌 없었습니다.
1986년 5월 27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해 7월 5일 306 보충대를 거쳐 육군 제3군수지원사령부 11보급대대 251중대 2내무반 금속수리반으로 배치돼 금속 수공구 수리병으로 군 생활을 했는데요. 활달한 성격에 다른 사병과 대인관계도 좋아서 남들보다 군 생활을 잘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7년 12월 4일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부재자 투표가 있었고, 그날 정연관 열사는 원통하게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당시 군대 내에서는 부정 선거가 만연했습니다. 열사가 근무한 부대 중대장 김아무개 대위는 매주 수요일 정신교육 시간에 여당 후보 당선 필요성을 강조했고, 개인 면담 때에도 여당 후보를 지지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내무반장들에게도 자신이 맡은 반원이 여당 후보를 찍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투표 전부터 '기호 1번 노태우 후보를 찍으라. 몇 %까지 나오지 않으면 지휘관들이 옷을 벗는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투표 당일 군 간부는 기표 용지를 기호 1번이 위로 올라오도록 접어주어 1번을 찍도록 유도하기도 했고, 기표 용지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기표하게 하는 등 비밀선거 원칙을 위반하면서 투표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열사는 평소 "기호 2번을 찍겠다"고 밝히고 다녔습니다. 1987년 여름 휴가를 나와서도 민정당 당원이었던 아버지에게 "무조건 민정당 후보를 찍을 것이 아니라 인물을 보고 찍어야 합니다", "이 나라가 바로 서려면 김대중씨가 돼야 합니다"라고 자기 뜻을 밝혔습니다. 군 부재자 투표와 관련해서도 동기와 선임병에게 "김대중 후보를 찍겠다"고 서슴없이 밝혔습니다. 결국 부정 선거 공작에도 불구하고 정연관 열사 본인을 비롯 동료 두 명을 설득해 2내무반에서 야당 투표 총 3표가 나왔습니다.
이윽고 중대장 김아무개 대위는 야당후보 기표자가 3명 나온 사실을 알고 "야당 찍은 놈이 3명이나 나왔다"며 2내무반장을 꾸짖었습니다. 2내무반장은 일석점호 전 "너희들 말이야, 사전교육한 대로 여당을 찍지 않고 왜 야당을 찍었느냐, 야당 찍은 놈 손들어"라고 하면서 내무반원들을 질책했습니다. 점호 후 취침 시간이 되자 내무반 '군기군번'이었던 백아무개 병장은 내무반원들을 모두 기상시킨 후 구타하기 시작했습니다.
후임병 10명이 내무반 침상에 정렬했습니다. 백아무개 병장은 주먹으로 2회씩 가슴을 가격했는데, 이때 정연관 열사가 주먹에 맞아 뒤로 넘어져 관물대에 머리를 부딪혔습니다. 열사가 일어나지 못하자 백아무개 병장은 "엄살부리지 말라"면서 몸을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정연관 열사는 일어나지 못했고, 백 병장은 인공호흡을 실시하고 사무용 칼로 손등에 상처를 내며 구호 조치를 했으나 몸은 점점 굳어갔습니다. 뒤늦게 인근 106 후송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숨진 후였습니다. 사인은 원발성 쇼크사이며, 향년 21세였습니다.
다음날인 12월 5일 새벽 5시 본가로 사망 통고 전화가 갔습니다. 황망한 가족이 사망 이유를 묻자 부대 관계자는 그저 "와 보면 안다"고 답했습니다. 군은 부정선거와 관련된 내용을 철저하게 은폐했습니다.
김아무개 중대장은 부대원들에게 정연관 열사의 죽음이 군 부재자투표와는 관련 없는 '단순한 구타 사고'라고 말하라 지시했습니다. 보안사령부 수사관은 '이 사건은 군 부재자투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진술하고, 이에 대해 입조심을 하라. 백 병장이 혼자서 주먹으로 가슴을 때려서 사망한 것이라고 진술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또 보안사령부는 정연관 열사 본가를 감시하고 출입자를 통제하기도 했습니다.
1987년 선거가 끝난 후 1989년 국회에서 '양대선거부정 조사특별위원회'가 설치됐는데요. 이미 전역한 사람이 증인으로 채택되자 군은 전화를 하거나 부대로 불러 당시 진술서를 보여주며 그대로만 증언해 달라 강요했습니다. 훗날 진실을 밝힌 증인 홍아무개는 "진실을 말하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전부 아니라고 하는 상황에서 진실을 말해 봐야 혼자 병신 취급받게 될까봐 말을 못했고, 과거 헌병대에서 입을 맞춘 대로 답변을 했으며, 그 이후 계속 괴로웠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이어졌는데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인권위원 공정선거 감시단'에 있었던 김용현씨는 유족에게 정연관 열사가 '부재자 투표에서 야당을 찍었기 때문에 구타당하여 사망했다'고 전해줬습니다. 열사의 어머니는 김용현씨와 함께 1년 2개월 동안 사고 당시 부대원들을 찾아다녔는데요. 내무반장 3차례, 사건 당일 주번하사 6차례 그리고 가해자 백 병장을 5차례나 찾아가 '정연관 죽음의 진실을 말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열사가 사망한 지 17년이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모든 진실이 드러나게 됐습니다.
이렇듯 대전현충원 곳곳에 민주화운동 열사 희생자가 잠들어 있습니다. 그들의 노력과 저항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여기까지 성장해 올 수 있었습니다.
[참고자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https://www.kdemo.or.kr/)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관 (http://yolsachumo.org/)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자료집 <끝내 살리라> (민족민주열사희생자단체연대회의, 2005,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차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3,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발간위원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2차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4,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발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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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시민활동가입니다. 우리 지역 현장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가 필요한 분에게 마이크 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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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병에 '야당 찍겠다' 선언, 이후 그는 군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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