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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병에 '야당 찍겠다' 선언, 이후 그는 군대에서 죽었다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 민주화운동 열사 희생자 이승삼·이진래·정연관 열사

등록 2024.05.28 10:33수정 2024.05.2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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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승삼 열사
고 이승삼 열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육군이병 이승삼의 위패 (현충탑 03-3-707위)
육군이병 이승삼의 위패 (현충탑 03-3-707위)김선재
 
평범한 사람의 노력과 희생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만들어 왔습니다. 대전현충원에는 민주화운동 과정에 힘을 모았던 열사와 희생자가 여럿 안장돼 있습니다.

이승삼 열사
 

현충탑 03-3-707위에는 이승삼 이병의 영혼을 기리는 위패가 봉안돼 있습니다. 이승삼 열사는 1966년 부산 당감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983년 4월 2일에는 부산 당감성당에서 부산 울산 경남 지역 민주화운동 대부로 불린 송기인 베드로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부산 당감성당은 민주화운동 근거지였습니다.

1986년 2월 이승삼 열사는 부산공업전문대 전기과에 입학했는데요. 학교에서 가톨릭 학생회 회장을 역임하며, 부산지역 가톨릭 학생회 회장단 모임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성당에서는 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5.18 민중항쟁 사진전과 비디오를 돌려보며 민주 의식을 형성했습니다. 직선제 개헌과 민중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와 집회에도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1986년 12월 16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후, 1987년 2월 2일 강원도 원주에 있는 36사단으로 배치받아 공병대 본부중대 행정반 서무계 조수로 군 생활을 시작했는데요. 민주 의식을 가지고 있던 열사는 군대 내 부조리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열사는 고참이 내린 부당한 지시를 거부했는데요. 이로 인해 고참병으로부터 수시로 기합과 얼차려를 당했습니다.

당시 부대에서는 분위기 상 후임병이 구타를 당하거나 금전을 도난당해도 고참이나 상급자에게 보고할 수 없었는데요. 이승삼 열사는 부당하게 구타당한 점과 금전 도난 사실을 당시 일직사관에게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보고 체계를 통해 어려움을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는 점은 없었습니다. 구타행위와 내무 부조리는 그대로였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보고한 탓에 중대원 전원이 집합해 군장 구보를 하게 되는 등 이승삼 열사가 군 생활을 하기에 더욱 어려운 상황에 빠집니다.

1987년 3월 1일 외박을 통해 어머니와 같이 시간을 보낸 밤이 가족과 보낸 마지막 시간이 됐는데요. 이틀 후 3월 3일 부산 본가에 이승삼 열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3월 3일 열사는 당일 대공초소 근무 편성표에 근무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고참들이 부당하게 근무 편성을 바꿔 4시간을 대공초소에서 근무했습니다. 마지막 근무였던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 최아무개 일병은 군기가 빠졌다는 이유로 또 한 번 이승삼 열사를 폭행했습니다. 오후 4시 근무가 끝난 이후 이승삼 열사를 본 이는 아무도 없었는데요. 오후 5시경 중대장실에서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총알은 턱 밑으로 들어가 정수리를 관통했고 현장에서 즉사했는데요. 사체가 발견된 모습이 석연치 않았습니다. 몸을 쭈그린 채 턱을 난로 보호대에 걸쳐진 상태였습니다. 담배꽁초가 총 3개비 발견됐는데요. 난로 뚜껑 위 1개, 사체 앞에 1개, 난로 뒤에서 1개가 발견됐습니다. 묵주반지는 난로 위, 장갑은 난로 안전대에 걸쳐져 있었습니다. 철모와 방한 목도리는 중대장실 옆 행정반 의자 위에 놓여있었습니다. 총은 난로 옆에 가지런히 세워진 점도 의혹을 증폭시켰습니다.

유가족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대통령, 국방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헌병감, 여야 당수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했습니다. 이후에도 의문사 유가족협의회 등 단체와 함께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 나섰고, 1988년 10월 17일부터 1989년 2월 27일까지 135일 동안 기독교회관에서 농성을 이어갔습니다. '의문사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를 통과할 때까지는 422일간 국회 앞 천막농성에 참여하는 등 유가족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출범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은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밝혀질 수 없었는데요. 최초 조사에서 부대 내 내무 부조리에 대한 수사가 없었던 점, 담배에서 타액 검사를 하지 않은 점, 깨진 안경 조각이 중대장실과 행정반에서 발견됐는데 폭행 가능성 수사가 없었던 점, 발견된 탄피가 누구 총에서 발사됐는지 확실하게 감정되지 않은 점, 시체 부검과 현장 사진이 사라진 점 등 초기 부실한 수사로 인해 끝내 진실은 묻히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자살·타살 여부를 떠나 열사를 군 민주화와 관련한 사망으로 인정했는데요. 열사가 군의 비민주적인 운영에 온몸으로 저항했고, 사망하기 바로 전까지 육체와 정신에 고통받은 점에 주목했습니다. 결국 공권력이 위법하게 개입해 이승삼 열사가 사망에 이르렀음을 인정한 사례가 됐습니다.

이진래 열사
  
 고 이진래 열사
고 이진래 열사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위원회
   
 육군이병 이진래의 묘 (장병 7묘역 704-62934호)
육군이병 이진래의 묘 (장병 7묘역 704-62934호)김선재
 
장병 7묘역 704-62934호에는 이진래 열사가 잠들어 있습니다. 열사는 1959년 2월 17일 4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 전남 보성북중학교와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79년 3월 1일 두 번 낙방 끝에 3수로 서울대학교 제약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열사는 1979년 부산·마산 민주항쟁,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1980년 서울 평화시장 피복근로자 농성사건, 서울대 '민주화 대총회', 학생 1만 명 '민주화 대행진' 기간 설정 및 선포 등 크고 작은 시위 현장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1980년 5월 초 '전두환 신군부 퇴진'을 주장하는 서울대 학생 가두시위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5.18 민중항쟁 당시에는 광주로 직접 내려가 "전두환 신현확 물러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군부 독재에 항거하며 10여 일 동안 항쟁에 직접 참여했는데요. 훗날 동료 학생에게 "광주에 있으면서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왔다"고 이야기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1981년 11월 14일 입대해 논산 제2훈련소에서 4주간 교육을 받은 후 평택에 있는 카투사 교육대에서 3주간 교육을 추가로 받았습니다. 1981년 12월 31일 대구 캠프 헨리에 도착합니다. 1월 1일 휴일을 부대에서 보내고, 1월 2일 아침 8시 경 막사 앞 향나무에서 목을 맨 채로 발견됩니다. 열사는 사망하기까지 짧은 군 생활 중에도 동기들에게 5.18 민중항쟁을 이야기하며 알렸습니다.

당시 미육군범죄수사대는 이진래 열사가 입대 전부터 앓아오던 척추 디스크 등을 비관해 자살했다고 결론내렸는데요. 유가족은 절대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1982년 1월 3일 아침 방첩대 소속이라 밝힌 성명을 알 수 없는 준위 한 사람이 유가족을 찾아왔는데요. 시위 참여 일자 등이 기재돼 있다는 노란색 신상 카드를 내밀면서 '국가를 비방하고 반역한 사람이 자살을 했으면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라고 유가족을 협박했습니다.

이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했지만 당시 보안부대 담당자는 이미 사망한 이후라 조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당시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기록과 자료에는 접근이 어려워 결국 열사의 죽음은 '진상규명불능'으로 남게 됐습니다.

정연관 열사
  
 고 정연관 열사
고 정연관 열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육군병장 정연관의 묘 (장병 1묘역 103-3230호)
육군병장 정연관의 묘 (장병 1묘역 103-3230호)임재근
 
끝으로 장병 1묘역 103-3230호에 정연관 열사가 안장돼 있습니다. 1966년 12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정연관 열사는 대구 남산국민학교, 경구중학교, 포항 성광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대구 계명대학교 정문 앞에서 액세서리 점포인 '선물의 집'을 성실하게 운영하고 있었는데요.

1985년 계명대학교 총학생회는 5.18민중항쟁 기념 기간을 정해 사진 전시와 비디오 상영을 했습니다. 이때 정연관 열사는 마침 계명대에 재학 중이던 중·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한 동아리에서 5.18 민중항쟁 비디오를 보게 됐습니다. 이후 열사의 마음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의식을 가지게 됐고, 주변에 자기가 가진 정치 소신을 밝히는 데 거리낌 없었습니다.

1986년 5월 27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해 7월 5일 306 보충대를 거쳐 육군 제3군수지원사령부 11보급대대 251중대 2내무반 금속수리반으로 배치돼 금속 수공구 수리병으로 군 생활을 했는데요. 활달한 성격에 다른 사병과 대인관계도 좋아서 남들보다 군 생활을 잘 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7년 12월 4일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부재자 투표가 있었고, 그날 정연관 열사는 원통하게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당시 군대 내에서는 부정 선거가 만연했습니다. 열사가 근무한 부대 중대장 김아무개 대위는 매주 수요일 정신교육 시간에 여당 후보 당선 필요성을 강조했고, 개인 면담 때에도 여당 후보를 지지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내무반장들에게도 자신이 맡은 반원이 여당 후보를 찍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투표 전부터 '기호 1번 노태우 후보를 찍으라. 몇 %까지 나오지 않으면 지휘관들이 옷을 벗는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투표 당일 군 간부는 기표 용지를 기호 1번이 위로 올라오도록 접어주어 1번을 찍도록 유도하기도 했고, 기표 용지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기표하게 하는 등 비밀선거 원칙을 위반하면서 투표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열사는 평소 "기호 2번을 찍겠다"고 밝히고 다녔습니다. 1987년 여름 휴가를 나와서도 민정당 당원이었던 아버지에게 "무조건 민정당 후보를 찍을 것이 아니라 인물을 보고 찍어야 합니다", "이 나라가 바로 서려면 김대중씨가 돼야 합니다"라고 자기 뜻을 밝혔습니다. 군 부재자 투표와 관련해서도 동기와 선임병에게 "김대중 후보를 찍겠다"고 서슴없이 밝혔습니다. 결국 부정 선거 공작에도 불구하고 정연관 열사 본인을 비롯 동료 두 명을 설득해 2내무반에서 야당 투표 총 3표가 나왔습니다.

이윽고 중대장 김아무개 대위는 야당후보 기표자가 3명 나온 사실을 알고 "야당 찍은 놈이 3명이나 나왔다"며 2내무반장을 꾸짖었습니다. 2내무반장은 일석점호 전 "너희들 말이야, 사전교육한 대로 여당을 찍지 않고 왜 야당을 찍었느냐, 야당 찍은 놈 손들어"라고 하면서 내무반원들을 질책했습니다. 점호 후 취침 시간이 되자 내무반 '군기군번'이었던 백아무개 병장은 내무반원들을 모두 기상시킨 후 구타하기 시작했습니다.

후임병 10명이 내무반 침상에 정렬했습니다. 백아무개 병장은 주먹으로 2회씩 가슴을 가격했는데, 이때 정연관 열사가 주먹에 맞아 뒤로 넘어져 관물대에 머리를 부딪혔습니다. 열사가 일어나지 못하자 백아무개 병장은 "엄살부리지 말라"면서 몸을 짓밟았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정연관 열사는 일어나지 못했고, 백 병장은 인공호흡을 실시하고 사무용 칼로 손등에 상처를 내며 구호 조치를 했으나 몸은 점점 굳어갔습니다. 뒤늦게 인근 106 후송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미 숨진 후였습니다. 사인은 원발성 쇼크사이며, 향년 21세였습니다.

다음날인 12월 5일 새벽 5시 본가로 사망 통고 전화가 갔습니다. 황망한 가족이 사망 이유를 묻자 부대 관계자는 그저 "와 보면 안다"고 답했습니다. 군은 부정선거와 관련된 내용을 철저하게 은폐했습니다.

김아무개 중대장은 부대원들에게 정연관 열사의 죽음이 군 부재자투표와는 관련 없는 '단순한 구타 사고'라고 말하라 지시했습니다. 보안사령부 수사관은 '이 사건은 군 부재자투표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진술하고, 이에 대해 입조심을 하라. 백 병장이 혼자서 주먹으로 가슴을 때려서 사망한 것이라고 진술하라'고 강요했습니다. 또 보안사령부는 정연관 열사 본가를 감시하고 출입자를 통제하기도 했습니다.

1987년 선거가 끝난 후 1989년 국회에서 '양대선거부정 조사특별위원회'가 설치됐는데요. 이미 전역한 사람이 증인으로 채택되자 군은 전화를 하거나 부대로 불러 당시 진술서를 보여주며 그대로만 증언해 달라 강요했습니다. 훗날 진실을 밝힌 증인 홍아무개는 "진실을 말하고 싶었으나 다른 사람들이 전부 아니라고 하는 상황에서 진실을 말해 봐야 혼자 병신 취급받게 될까봐 말을 못했고, 과거 헌병대에서 입을 맞춘 대로 답변을 했으며, 그 이후 계속 괴로웠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이어졌는데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인권위원 공정선거 감시단'에 있었던 김용현씨는 유족에게 정연관 열사가 '부재자 투표에서 야당을 찍었기 때문에 구타당하여 사망했다'고 전해줬습니다. 열사의 어머니는 김용현씨와 함께 1년 2개월 동안 사고 당시 부대원들을 찾아다녔는데요. 내무반장 3차례, 사건 당일 주번하사 6차례 그리고 가해자 백 병장을 5차례나 찾아가 '정연관 죽음의 진실을 말해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열사가 사망한 지 17년이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모든 진실이 드러나게 됐습니다.

이렇듯 대전현충원 곳곳에 민주화운동 열사 희생자가 잠들어 있습니다. 그들의 노력과 저항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여기까지 성장해 올 수 있었습니다.

[참고자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https://www.kdemo.or.kr/)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관 (http://yolsachumo.org/)
민족민주열사희생자 자료집 <끝내 살리라> (민족민주열사희생자단체연대회의, 2005,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차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3,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발간위원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2차 (대통령소속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4,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발간위원회)
#대전현충원 #민주화운동 #군의문사 #열사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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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시민활동가입니다. 우리 지역 현장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가 필요한 분에게 마이크 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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