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내량해협일본함선이 오간 길목
여해고전연구소
[기사 수정 : 31일 오전 9시 5분]
1593년 3월 이순신은 조선수군의 연합군을 동원하여 웅포해전에서 일본함선을 격퇴하였다. 이때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가 합세하였다. 그후 일본의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나라와의 강화협상을 계기로 일본군에게 남하를 명하였고, 이에 조선군은 일본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는데, 명나라 장수들은 계속 체류한 채 소극적인 대응을 하였다.
이 해 5월부터 이순신은 창원과 웅천, 부산으로 가는 일본군을 제압하기 위해 거제 일대에서 진영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칠천량과 유자도(柚子島) 앞바다를 거쳐 거제의 세포로 진영을 옮겼다. 한편 일본군은 8백여 척의 함선을 웅천·제포·안골포에 정박하고, 호남으로 진입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이순신은 해상길목인 견내량과 한산도의 바다 가운데를 봉쇄하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축왜선장)
6월 거제의 오양역(烏壤驛, 거제 사등) 앞, 고성 역포(亦浦, 통영 용남면)를 거쳐 한산도 망하응포(望何應浦)로 진영을 옮겼다. 망하응포는 통영시 한산면 염호리 관암포로 보인다(김일룡). 그 후 견내량 해전이 발생했는데, 일본함선 10여 척이 견내량으로 가다가 조선수군에게 추격을 당한 후 유인책을 쓰려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 해전을 계기로 이순신은 견내량과 한산도 바다를 고수하기 위한 작전에 착수하였다. 그후 불을도(弗乙島, 거제 방화도) 외양과 한산도 우측 해중에 있는 세포(細浦, 비산도 손깨포구)로 진을 옮겼다가 7월 15일 드디어 여수 본영에서 진영을 한산도 두을포(豆乙浦)로 옮겼다. 두을포는 한산도 서쪽 두억 항구에 있는 의항(蟻項)인데, 왜적들이 이 항구에 들어오면 궁지에 몰려 개미처럼 기어오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노승석 역주))
이때 이순신은 현덕승(玄德升)이 보내준 편지와 선물에 대한 답서를 보내면서 아래와 같은 글을 적었다.
"호남은 국가의 울타리이니 호남이 없다면 국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제(7월 15일) 한산도에 진을 치어 바닷길을 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서간첩》
그 당시 호남은 서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일본군의 해상 침입을 방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파악한 이순신이 일본함선의 해상통로에 인접한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제압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수락한 결과 이순신은 한산도에 진영기지를 구축할 수 있었는데, 그러기까지 이순신은 해상 진영을 10회 옮겼다.
이때 선조는 일본군이 거짓으로 철수하는 척하다가 다시 전쟁하려고 하여 작전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이순신에게 전라좌수사의 본직을 유직한 채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하는 교서를 내렸다.(교서) 수군통제사제도가 창설되어 통영(統營)이 설치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의 통영이란, 통제사가 있는 진영으로 통제영의 의미다.(홍기문, 이은상) 특히 이순신이 한산도를 해상전략기지로 선택한 이유를 보면, 한산도는 하나의 산이 바다 굽이를 포위하여 안에서는 배를 감출만하고 밖에서는 안을 들려다볼 수 없으며, 호남으로 가는 일본선이 통과하는 경로이기 때문이다. 명나라 장수 장홍유(張鴻儒)도 여기에 올라가 한참 바라보고 "진정한 진처"라고 말하였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지은 『행록(行錄)』에 보면,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한산도에서 지낸 생활상이 자세히 적혀 있다. 가장 큰 업적으로 손꼽는 것은 한산도 불모지에서 자급책을 마련하여 군량을 비축한 일이다. 둔전 관리와 어로, 소금 생산으로 쌀과 교역하여 몇 만석의 식량을 비축하고 군수품을 모두 구비했으며, 그후 한산도에 촌락이 형성되어 하나의 큰 진영을 이루었다. 그 다음으로는 항상 근신하며 수양생활을 한 일이다. 평소에 소식하면서 불철주야 새벽까지 작전을 모의하고 전쟁을 철저히 준비하였다. 이처럼 수양자의 모습을 견지한 이순신의 한산도생활은 이순신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편 2018년에 필자가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산도민등장(閒山島民等狀)」을 발굴하여 새롭게 찾아낸 내용이 있다. 이 문서는 임진왜란기의 한산도 운영과 통제영 규모에 관한 고문서가 없는 상황에서 발견된 것이므로, 학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하였다. 여기에 적힌 전란 이후의 한산도민의 실정과 부역제도 등은 임진왜란기의 상황까지 유추할 수 있는 내용으로 파악되었다.
특히 1604년 통제영을 한산도에서 두룡포로 옮긴 이후에도 한산도에 영문(營門)이 남아 있었다는 내용은 임진왜란기 한산도에 통제영이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동안 한산도에는 해상 진영만이 있었고 영(營)이 존재했다는 명확한 기록이 없어서 이견이 있었는데, 이 문서내용을 통해 통제영의 존재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임진왜란기 작전본부인 운주당(運籌堂)이 그당시 불에 타서 없어지고 1740년 통제사 조경(趙儆)이 이 터에 제승당(制勝堂)을 세웠지만, 통제영이 존재했다는 근거가 미약했다. 또한 한산도에 이진된 초기에는 천여 가구가 살았음을 알 수 있었다.
임진왜란기 이순신은 일본함선이 오가는 길목인 견내량과 한산도 바다를 봉쇄하기 위해 한산도에 진영을 옮겨 작전본부를 설치한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그 당시 한산도는 전쟁하기에 유리한 해상의 요새로 정착되어 거대한 진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위의 새로운 기록에서 한산도에 영(營)이 존재했다는 내용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한산도에 주둔할 당시에 통제영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역사문헌을 통해본 한산도는 불철주야의 노력으로 불모지를 거대한 진영으로 발전시킨 이순신이 3년 8개월 동안 활약하여 위대한 치적을 남긴 곳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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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학자. 문화재전적 전문가. 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자문위원(난중일기). 현재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 문화재청 현충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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