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한지, 안료, 돌가루, 2024
김현정
- 동양화의 바탕이 되는 한지 위에 서양화용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시는데요. 얇고 부드럽지만 강한 한지가 다양한 색깔의 물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더욱 은은하고 아름다운 색감을 만들어내는 느낌입니다. 그래서인지 한지와 서양화용 물감을 함께 활용하는 방식이 '쉼'과 '치유'라는 주제와 잘 어울립니다.
"맞아요. 물감의 원재료인 안료와 적당한 접착력을 지닌 수용성 본드, 그리고 물을 적당량 섞어서 사용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모두 자연에서 온 것들로, 감정을 이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딱딱한 재료는 저와는 잘 맞지 않습니다."
- 붓으로 길게 획을 긋는 방식 대신 다양한 색깔의 물감을 붓에 묻혀 점을 찍는 색점 기법이 눈에 띕니다. 색점 기법을 보니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김환기 화백의 점화, 쇠라의 점묘법이 연상됩니다. 무수히 많은 붓 터치가 모여 하나의 조화로운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색점 기법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완성된 그림을 보면 처음부터 색점을 찍은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물방울이 맺혀서 생긴 얼룩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 겁니다. 자연스러운 색점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다 보니 이런 방법을 터득하게 됐습니다. 뭐든 자연스러운 걸 선호하는 편이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완성된 그림을 보고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한지에 맺힌 물방울이 다 마르기를 기다려야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기다리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꽃이 피는 과정, 혹은 나무가 자라는 과정을 슬로 비디오로 보는 느낌이랄까요? 사실, 저는 빨리 무언가를 해내는 게 참 힘든 사람입니다. 식물도 제대로 키우려면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저도 무언가를 기르고 기다리고 키워내는 과정을 즐기는 것 같아요."
- 여러 겹의 물감이 더해져 한지 위에 두툼한 색깔이 배어납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려주신 릴스 영상을 보면 붓에서 가볍게 흘러내리는 물감은 맑고 연해요. 하지만 수없이 색점을 덧입혀서 완성하신 작품을 보면 물감의 두께감이 상당합니다. 심지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어요. 단순히 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작가님의 마음과 시간이 겹겹이 쌓여가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그동안 선보인 제 작품들을 돌이켜 보니 정말 여러 겹의 색으로 층을 쌓은 작품이 많은 것 같아요. 한지라는 종이가 참 신기한 점은 캔버스 천보다 얇아 보이지만 안료들이 얇은 층 안에서 서로 색을 받아들이고 엉키는 과정에서 발색이 더 자연스러워져요. 그래서 그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리면 아크릴 위에 그릴 때보다 확실히 채도가 낮아요. 하지만 편안함은 있어요. 자연스럽거든요."
- 그림 위에 금박 덩어리를 올려놓고 도구를 이용해 잘게 조각내는 릴스를 봤습니다. 피아니스트 신기원이 연주하는 <Dream>이 배경 음악으로 깔려 있더군요. 경쾌하고 달콤한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커다란 금박이 수없이 많은 입자로 쪼개져 한층 은은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는 모습이 신비로웠습니다. 그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작가님도 작업하시는 과정에서 치유의 감정을 느끼시나요?
"저는 작업할 때 주로 피아노 음악을 들어요. 제일 편안한 악기 같아요. 개인적으로 현악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뭔가 조마조마한 긴장감과 예민함이 느껴져요. 인스타 릴스를 만들 때는 음악을 고르는 데 시간이 좀 걸려요. 신기원 곡은 경쾌한데도 깊이가 느껴지곤 해요. 재즈도 좋아해요. 자유로운 영혼들이 득실대는 어느 골목에 있는 것 같아서요.
몬드리안처럼 차가운 추상에 몰두했던 작가가 재즈에 매료됐다는 일화를 듣고 많이 공감했습니다. 예술가는 늘 나와 다른 무언가를 동경하거든요. 인상파 화가들이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한 우키요에라는 판화를 앞다투어 수집하고 따라 그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예술가 집단은 늘 새로운 뭔가를 갈구하는 집단이고, 예술가는 그 안에서 사는 걸 선택한 사람들이죠."
- 작품에 사용하시는 재료가 여느 작품의 재료와는 달라 보입니다. 은은하면서도 아름다운 빛깔이 뿜어져 나오는데요. 작가님이 사용하시는 재료에 관해서 설명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 작품을 보시는 분들이 재료에 관한 질문을 정말 많이 해요. 한국화를 전공한 분들도 많은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동양의 재료와 서양의 재료를 섞어서 만든 작품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업 형식도 좀 독특하긴 합니다. 다른 작가들과 달리 붓글씨를 쓰듯이 눕혀서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저는 금박과 은박도 즐겨 사용합니다.
마무리 단계에서 금박과 은박을 적당히 사용하는 건 뭔가 더 포인트를 주고 싶어서이기도 하고요, 색점들이 화면 위에서 아래로 살포시 떨어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더하고 싶어서이기도 합니다. 껌을 감싸는 종이보다 더 얇은 은박과 금박을 뾰족한 핀으로 찢고 두드려 붙이는 작업이라 힘은 들지만 집중하다 보면 재밌기도 하고 완성한 그림을 보면 숭고한 뭔가가 표현된 것 같아 만족감이 큽니다."
- <자연을 닮은 초록>을 작업하시는 과정이 담긴 영상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초록 위에 금박을 입히고 다시 초록 색점을 찍으시더라고요. 잘게 부서진 금박이 여러 겹의 초록 색점 사이에서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상처를 받는 일이 있는데요. 상처 위에 한 겹씩 약을 바르고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토닥여주는 모습 같기도 했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은 그런 노력과 인내의 시간을 견딘 후에야 얻을 수 있는 보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맞아요. 작업하는 시간은 내가 나를 토닥이는 시간처럼 느껴져요. 예술가들이 자신이 하는 작업을 그냥 일로만 느낀다면 절대로 그 작업을 계속할 수 없어요. 예술 작업의 매력에 빠지면 애인이랑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는 것 같은 애증의 관계가 생깁니다. 쉰 살이 되고 보니 예술가가 참 축복받은 직업같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