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각 수련병원이 전공의들의 사직서를 수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을 발표한 가운데 4일 서울시내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과 전공의에게 부과한 진료 유지 명령과 업무 개시 명령을 오늘부로 철회합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6월 4일 15시 '의료 개혁 관련 현안 브리핑'에서 전공의에게 부과한 명령들을 철회했다. 2월 6일 3058명의 의대 정원을 2000명 증원하겠다고 정부가 발표한 이후, 첫 명령이 내려진 지 넉 달 만이었다.
필수·지역의료 사직 전공의의 넉 달
필수·지역의료에 종사하는 이들에게서 직업에 대한 사명감과 희생 정신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힘들어도 환자와의 연대감, 생명을 살린다는 뿌듯함, 지역에 대한 애착이 그 길을 걷게 한다. 나 역시 그 선택을 동경하던 젊은 의사였다.
그렇기에 지난 2월 정부가 필수·지역의료를 살린다며 2000명 증원을 내세웠을 때, 필수의료에 막 들어선 나는 내 '순정한 의도'가 짓밟힌 것 같았다. 어떤 면에서 보다 쉬운 길을 버리고 나름 일정 정도의 희생도 안고 선택한 이 길을, 사회가 '의사 숫자를 늘리면 낙수 효과로 너 같은 필수·지역의료 의사는 얼마든지 생긴다'며 하찮게 말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넉 달간 '무슨 정책을 오기로 하나' 싶은 정부의 태도에 맞서며 숨가쁘게 뛰어 다니다 보니, 병원 속 나의 세계가 얼마나 좁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국회와 광화문 광장에는 수많은 이들의 사연과 억울함이 담긴 깃발과 현수막이 색이 바래도록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전공의들의 외침이 신문과 방송을 가득 채우는 동안에도 노동자와 환자, 군인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내가 가진 자긍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낯 뜨거웠다. 행동하지 않는, 희생과 사명이라는 번지르르한 나의 말은 단지 젊은 청년의 도덕적 우월감이나 치기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수술방에서는 늘 그렇듯이 묵묵히 그리고 조용히 누군가 찢어진 심장혈관을 꿰매고 막힌 뇌혈관을 뚫고 있었고, 분만실에서는 새 생명들을 받고 있었으며, 응급실에서는 삶의 경계를 힘겹게 지키고 있었다.
강원도 산골짜기의 '지역의료'
사직 후 지역의료 연구자들을 따라 강원도 산골짜기를 들렀다. 인구가 1만에 못 미치는 이 읍내에는 병원 하나 없이 의원 세 곳, 보건소 한 곳이 있다.
산이 멋지고 바람이 좋아 눌러앉은 지 두 달 차가 되었다. 그러나 이곳 산의 풍경보다 멋진 것은 조용히 오래 전부터 지역에서 주민들의 건강을 지켜오던 선배 의사들의 모습이었고, 바람보다 좋은 것은 의사가 된 지 불과 얼마 되지도 않은 나를 따듯하게 맞아주는 보건소의 직원들과 지역사회 주민들의 환영과 미소였다. 젊은 총각 선생님이 훤칠하게 잘 생겼다는 말을 하루 한 번은 듣나보다.
"귀한 의사 선생님 오셔서 참 좋네요."
언젠가부터 나는 필수·지역의료에서 일하는 것이 '희생'이나 '봉사'라고만 생각했던 부분이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웬걸, 이곳에 와보니 지역사회의 의사 선배들은 보람과 열정으로 즐겁게 일하고 계셨다. 허리 아픈 환자에게 약을 처방하기보다는 운동법을 알려주었고, 교회·새마을회·봉사단·영농회들을 통해 지역사회에 깊숙이 관계맺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두터운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에도 어두운 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산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기에, 이런 강한 유대감을 가진 지역사회가 얼마나 배타적일 수 있는지를 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두려워 피해 가는 삶보다는, 후회할지언정 시도하는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