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머리와 용꼬리고흥읍에는 홍문(무지개다리)이 두 개 있는데, 옥하리 홍교는 다리 밑에 용머리가 있고, 서문리 홍교는 다리 좌우에 용 머리와 꼬리가 있다.
이병록
고흥에 있는 사도, 여도, 녹도, 발포진 중에서 옛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곳은 사도와 발포이다. 여도는 여호항이 되고, 녹도는 녹동항이 됐다. 다만 녹동 앞 소록도라는 섬이 녹도 이름을 지키고 있다. 사도와 발포는 옛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 사도(蛇渡)의 '도'자는 섬 '도(島)' 자가 아니고 건널 '도' 자다. 사도 마을 뒷산과 성 모습이 뱀 머리처럼 보이고, 바로 앞에는 개구리처럼 보이는 와도가 있다. 그래서 개구리를 넘보는 사도 혹은 사두(머리)라고 불렀다.
발포는 마을 앞 포구가 스님 밥그릇인 발우와 비슷하게 생긴 데서 유래한다. 이순신 장군은 36세에 발포만호로 근무했다. 상관인 전라 좌수사가 오동나무를 베서 보내라는 것을 "나라 재산을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다"라고 거절했다.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쌓은 수군과 지리적 경험은 뒷날 임진왜란 때 승리의 동력이 된다.
땅 이름뿐만 아니라 성도 같이 남아 있어야 금상첨화다. 단단할 돌로 쌓은 성도 흔적이 거의 없다. 여도에서 골목을 돌면서 만나는 주민들에게 묻는데, 자기 집이 옛날 성안이라고 한다. 그런데 성벽이 어디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른다. 산과 골목을 헤매다 포기하고, 부두에서 산을 올려다보니 성벽 흔적이 조금 보인다. 아내가 용감하게 어느 집 마당을 통과해 성 흔적을 사진기에 담았다.
정3품 전라 좌수사가 있던 여수가 주진이고, 다음 큰 거진이었던 사도는 첨사가 지키던 중요한 진임에도 안내판만 달랑 서 있다. 주민에게 물어보니 해창만을 메우는 잡석으로 썼다. 바다에서 오는 적을 막는 성벽이 바다를 막는 데 쓰였다니, 성 돌을 빼어 집 담장을 쌓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다. 중간에 나라가 없어졌으니 돌인들 온전했겠는가?
늦게나마 성곽의 모습을 일부 복원한 곳은 발포와 녹도다. 발포항은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관아 터 뒤편에 충무사를 세우고, 성을 일부 복구했다. 주민이 어렸을 때는 흙성이었다고 한다. 발포항 수문장 역할을 했고, "활개 치듯 한다"하여 붙여진 활개 바위 위치가 있다. 어부에게 물어보니 배를 타고 가야 한다고 해서 포기하였는데, 충무사 관리인이 방파제에서 보인다고 하여,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바닷가에는 송씨 열녀 동상이 있는데, 황정록 발포만호가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자 부인이 바다에 몸을 던져서 자결했다. 남편에 대한 사랑일까? 왜적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일까? 발포에 특히 애착이 가는 것은 이순신 장군이 근무했던 곳이고, 내가 해군사관학교 발포 중대 출신이라서 그런가 보다.
녹도 성을 복원한 것은 어업과 상업 중심지이고, 두 분의 유명한 장군을 모신 쌍충사 때문일 것이다. 임란 5년 전 손죽도에 쳐들어온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충렬공 이대원 장군을 모셨다. 이순신 장군 오른팔이던 충장공 정운 장군을 추가로 모시면서 두 충신을 모신 쌍충사(雙忠祠)가 되었다. 전투에서 용감하게 죽어서 이름을 더 날리고, 그 이름 때문에 성도 되살아났다.
이밖에도 고흥에는 이순신 장군과 당포해전, 옥포해전에 참전하고, 제2차 진주성 전투에 때 공을 세운 진무성 장군 영정을 모신 무열사가 있다. 수시로 왜적이 침입했던 시절에는 바다가 편안해야 나라가 흥했다. 이제는 고흥이 대한민국을 하늘에서 흥하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기를 기대한다.
고흥에 가면 쑥섬과 연홍도를 반드시 가볼 것을 추천한다. 쑥섬은 무덤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자연을 잘 활용하고, 섬 전체가 박물관인 연홍도는 작품을 조금만 늘리면 대한민국 최고의 자연 박물관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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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해군 제독
정치학 박사
덕파통일안보연구소장
전)서울시안보정책자문위원
전)합동참모본부발전연구위원
저서<관군에서 의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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