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3월 8일자 <제주신보> 영인본. 기사는 감찰청의 불허로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지 못한 데 유감을 밝하고 있다.
김명근
그 사실을 무시하고 지나간 경관에 분노한 군중이 경찰에 돌을 던졌다. 경찰은 이를 폭동으로 판단해 시위대에 총을 겨눴다. 이 과정에서 젖먹이를 안은 여자와 초등학생을 포함해 6명이 사망했다. 주민들은 진상 규명과 발표 경찰 책임규명 등 처벌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경찰은 기관총을 꺼내 들어 위협했다.
미군정은 해당 사건을 '시위대에 의한 경찰 습격사건'으로 정당방위를 인정했으며, 시위 주최자들을 연행해 갔다. 양측 대립이 고조되자 제주신보 기자들이 중재자 역할에 나섰다. 제주신보는 3·1발포 사건의 '진상조사단 조직'을 기사를 통해 알렸다.
"3·1기념일의 불의와 참사에 대해 6인의 희생 동포와 그 유가족의 정중한 조의를 표하오며 6인의 중상자 및 5인의 경상자에 대하여 위문의 말씀을 드린다. 우리는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여 천하에 발표하고자 각계를 망라하여 진상조사단을 조직하려 하였으나 감찰청의 불허로 실현치 못함은 유감천만이다. 그러나 지난 3일 관계자의 주최로 조사단이 구성되어 지금 임무를 수행중인 바 불원 그 결과가 발표될 줄 믿는 바이며, 우리도 조사단의 임무완수에 적극 협력하여 하루바삐 진상이 명백하여지도록 모든 자료를 공급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희유한 참사이므로 우리는 금후 그 책임의 소재를 확실히 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1947.3.8. 제주신보
② 제주총파업
경찰의 과잉진압이 알려지자 3월 9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이 이뤄졌다. 파업은 행정기관, 학교, 회사, 은행 등 160개 단체와 4만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였다. 총 166개 기관 중 95%가 참여했다. 그중 일부 경찰지서도 파업에 동참했다. 중문지서 경찰관은 파업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중문지서 직원 일동은 오늘까지 치안 확보라는 숭고한 정신을 봉직해 왔으나 금번 발포사건을 말미암아 그 희생적 정신은 수포가 됐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 악독한 명령을 복종할 수 없으므로 직장을 떠난다."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도 치안 상태를 시찰하고자 입도해 북국민학교에서 시국 강연을 하는 등 안전 대책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3월 19일 담화에서는 경찰의 발포를 '치안유지에 입각한 정당방위'라고 인정했다. 이후 조병옥은 "당시 사상이 불온하고 건국에 저해되는 이들을 싹 쓸어버릴 수 있다"며 "제주 전 인구가 20만 밖에 안됐는데 20만 명 다 죽여도 좋단 말이야. 소통하란 말이야 무조건. 제주 놈들 다 죽여도 좋다"라고 말했다.
"제주도 전역은 3·1절 불상사 이래 치안에 있어서 악화 일로를 발 뻗침에 제주도 군정청을 위시한 각 관공서 교육, 교통, 각 기관이 총파업의 세를 갖추어 정상 활동의 마비 내지 사회적 무질서에 직면해 있음으로 본관은 중대 결심을 가지고 제주도에 왔던 것이다. 3월 15일까지도 파업의 강고는 물론 집회 행력 및 폭동준비의 실상으로써 치안경찰에 대한 우려는 불선했다.... 바라건데 사회는 경찰과 협력해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를. 10월 폭동사건과 제주사건 같은 사회 무질서의 반발은 오로지 국내로는 건국력을 상실케하고 국제적으로는 국민적 위신을 추락케 할 뿐이다" - 1947.3.22. 제주신보 「경무부장 담화발표」
③ 양은하 고문 치사 사건
조병옥 경무부장이 제주를 다녀간 이후 경찰의 고문 행위는 극에 달했다. 그중 대표적인 사건이 1948년 3월 14일 모슬포에 사는 청년 '양은하'가 고문에 못 견뎌 사망한 사건이다. 기사는 "양은하가 수감 중에 돌연 급사해 의사가 현장에 출장 검사한 결과 '고환'이 상해서 급사한 것으로 판명했다"고 밝혔다.
"대정면 영락리에 거주하는 양은하(27세)란 청년은 포고령 위반 피의로써 모슬포 지서에 검속되어 있던 중 작 14일 아침 4시 돌연 급사하였다는데 이 급보에 의하여 제주 검찰청 청장 및 제주 경찰 감찰청 수사과장 의원 문 의사가 급거 현장에 출장하여 검시한 결과 '고환'이 상해서 급사한 것으로 판명되어 담당 취조 경관 및 2명을 경찰청장 명의로 즉성에 검속하고 방금 엄중 취조 중에 있다 한다." 1948.3.16. 제주신보 「모슬포 지서에 불상사」
"북군 관내에 있어서 일시 맹렬한 검거선풍이 일어나 동요하든 민심이 다소간 안정을 보이고 있는 요즈음 이번은 남군 관내에 또 관공사 직원 등 증거가 확연한 자들을 속속 검거해 역시 검거 선풍을 이루고 있다 하는데 귀추가 주목된다" - 1947.4.22. 제주신보 「검거선풍 남으로」
④ 4월 3일 무장대 습격 사건
김달삼을 주축으로 300명 남로당 무장대가 오름마다 피어오른 봉화를 신호로 도내 12개 지서를 공격하고, 우익단체 기관과 서북청년단 숙소를 기습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 4명,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이 사망했다. 정부는 사건 진압을 위해 100명의 응원 경찰을 제주도에 급파하고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당시 사령관으로 김정호 경무부 공안국장이 임명됐다. 김정호는 4월 8일 무장대 소탕전을 전개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一. 폭동의 주모자와 직접 행동으로 범죄를 강행한 자는 자수하라.
二.무기와 흉기를 가진 자는 신속히 경찰관서에 납부하라.
三. 폭도에게 식량을 보급한 자 또는 금전 물품 등을 제공하고 부화뇌동한 자도 자수하라" - 1948.4.18 제주비상경비사령관 김정호의 경고문 발표
"내가 제주에 와보니 서울에서 들은 봐와 꼭 같은 상태에 있다. 내가 내도한 목적은 민중을 탄압하는 것보다는 민중의 참다운 여론을 듣고 서로 협동해서 선무를 통해 민심을 안정시키고 동족상잔을 막자는 점에 있다. 그럼으로 나는 항상 민중과 접촉해 민중의 소리를 듣는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하며 무력이며 탄압으로 치안을 확보하려는 것은 벌써 낡은 치안 유지 방법이며 폭력과 동족상잔을 절대 회피해 도덕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할 것이다." - 1948.4.20. 제주신보 기사 「사건 진압을 위해서 - 김 공보실장 담화발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주의 및 극렬의 공산주의에 감염되어 망국 사상에 중독된 일부 매국도배들은 사려와 판단력이 연약한 청소년과 천진무지한 노동자와 농민 동포들을 선동과 모략으로 또는 금전으로 매수해 파괴와 살상을 일삼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폭행은 세계에 대하여 우리 문화성을 의심하게 할 염려가 불문하니 이와 같은 것을 제거함이 국립 경찰의 아니 우리 민족에 부여된 지상 명령입니다." - 1948.4.20 제주신보 「金 공보실장 도민에 멧세-지」
# 강경 토벌과 함께 사라진 제주신보
제주도는 1947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무장대의 선거 방해로 선거구 3곳 중 2곳이 불에 탔다. 1개 선거구만이 간신히 치렀는데, 전국에서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해 조병옥의 분노를 샀다. 이는 제주가 '붉은 섬'으로 낙인찍히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됐다. 정권을 잡은 이승만은 경찰 인력을 제주에 대거 투입했으며 미군정은 해안선을 봉쇄했다. 같은 해 10월부터는 군대까지 투입해 초토화 작전을 시행했다.
섬 전체가 피로 물들고 <제주신보>도 온전하지 못했다. 김호진 편집국장은 동료들과 함께 무장대 지휘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를 인쇄해 준 혐의로 계엄당국에 체포돼 처형됐다. 그해 12월, <제주신보>는 서북청년단에 접수돼 결국 기관지로 전락하고 만다.
제주대학교 고영철 교수는 "김 편집국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국 언론사상 첫 번째로 희생당한 언론인"이라며, "그는 이승만 정부의 권력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4·3 제물로 사라진 것"이라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