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요하네스 베르메르 (Johannes Vermeer, 1632~167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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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가장 세밀한 독서'라고 믿었던 초보 시절부터 번역은 '최선의 패배를 꿈꿔야 하는 일'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깨닫게 된 지금까지, 누군가의 말을 정확하게 옮기는 일은 늘 어려웠다. 아무런 맥락 없이 등장한 어색한 문장의 정확한 의미가 이해되지 않아 한참 동안 인터넷을 뒤지고 참고문헌을 읽는 일이 허다하다.
어디 그뿐일까. 영어로 쓰인 글 곳곳에 숨어 있는 제3의 외국어를 제대로 번역하고 그 발음을 정확하게 표기하기 위해 낯선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일도 다반사였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세계를 또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은 서른 평짜리 아파트의 짐을 곱게 포장해 다른 집으로 옮기는 일을 넘어설 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런 불확실하고 고독한 나의 번역 여정을 항상 말없이 응원해 준 것은 사전이었다.
재미있게도, 초보 시절에는 사실 사전을 뒤질 일이 많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단어가 나오면 별다른 의구심 없이 앞뒤 맥락을 따져 퍼즐을 맞추듯 문장을 완성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사전을 찾는 일이 늘어난다. 정확한 의미와 뉘앙스를 찾기 위해 국어사전을 몇 번이고 파헤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인터넷 용어 사전이나 슬랭 용어 사전까지 뒤지는 시간도 대폭 늘어났다.
생각해보면, 내가 두려운 건 번역이 형편없다는 독자들의 날 선 비판이나 오역으로 뒤범벅된 책이라는 비난성 기사가 아니다. 그보다는, 최선도 차선도 아닌, 최악의 패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부족한 시간을 이유로 만족스럽지 못한 원고를 떠나보내는 순간. 그 순간이 항상 두렵다.
끝도 없이 이어진 낯선 산길을 홀로 걷는 듯한 고독감에 사로잡힌 내게 사전은 언제나 옳은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돼준다. 글을 쓸 때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전은,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보는 나의 감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너무도 익숙한 그림이어서 그런지 그림보다 그 옆 아홉 글자가 눈에 박혔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라는 아홉 글자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귀걸이'가 표준어인지, '귀고리'가 표준어인지.
물론, '귀걸이'와 '귀고리' 사이에서 의문을 품은 적이 있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사전을 뒤졌던 기억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 정답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또다시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보다도 정답을 찾는 게 중요했다.
답이 필요할 때 확실한 정답을 알려주는 건 사전밖에 없다. 사전을 뒤지기 전에 먼저 답해 보자. 당신이 생각하는 정답은 무엇인가? 마음속에 어렴풋이 답이 떠올랐는가? 자, 그렇다면 다시 묻겠다. 그 답이 정답이라고 확신하는가? 마음이 갈팡질팡 흔들리는가?
이번에는 다행히 틀린 답이 없었다. 둘 다 정답이다. 사전에 적힌 정의에 의하면, '귀걸이'와 '귀고리'는 모두 '귓불에 다는 장식품'을 뜻한다. 애당초 오답이 없는 문제라니 허탈하기도 하고 안심이 되기도 한다.
번역일을 시작하며 내가 처음 꾸었던 꿈은 원문보다 나은 번역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런 터무니없는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은, 번역은 원문과의 경쟁에서 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전제를 몰랐기 때문이리라.
마찬가지로, 답을 찾으려면 직접 사전을 뒤져봐야 한다. 그 전제를 외면하고 그저 '귀걸이'와 '귀고리' 중 하나만이 정답일 것이라고 믿으면 결코 정답을 찾을 수 없다. 우리 삶에 늘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정답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겠다. 하지만, 정답과 오답 사이에서 흔들릴 때, 오역이 두려울 때, 진실을 알려주는 사전을 믿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오랜 번역일로 찾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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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와 귀걸이 사이, 번역하다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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