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 위치한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전공부
주간함양
다양한 가치를 유기농업을 통해 실천하는 풀무학교에 자부심이 있었던 오도 선생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 살충제를 씨앗에 묻힌 후 염색액에 굴린 이 씨앗을 심는다면 아무리 유기농업으로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소용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씨앗을 의심하는 일은 우리 농업에 없던 전통이다. 수많은 농민의 손을 거쳐 온 토종씨앗이 기본이던 사회가 끝나자 우리 현대인들은 씨앗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최고의 혼수가 아기라는 씁쓸한 이야기 전에는 가전제품과 집이 있었고 다양한 예물 이전에 그 자리는 반듯한 양단이 차지했다. 씨앗은 그 이전의 이야기다. 고향을 떠나면서 남은 평생을 고향의 이름, 택호로 불릴 우리나라 딸들은 고향의 씨앗을 혼수로 가져갔다. 지금은 80대가 넘은 할머니들이다. 이들은 농민의 고질병인 관절통을 겪으면서도 매년 씨앗을 심고 수확하는 일을 반복했다. 매년 "안 한다"지만 작은 텃밭에 심기는 토종씨앗은 습관, 관습이고 어쩌면 나고 자란 고향과의 정서적 이음이다.
씨앗을 의심하면서 알게된 건 GMO(유전자변형 농수산물)의 위험성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씨앗받는 농사를 시작하게 됐다.
"씨앗을 받으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방법을 기록한 책이 없는 거예요. 고민을 하다 일본에 계신 선생님에게 책을 한 권 받았어요. 일본어 번역된 호주 시드 세이버스 단체의 책을 받고서 씨앗 받는 방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거예요. 우리나라에 책이 없으니까 내용을 정리해서 학교 교과서로도 만들고 마을 사람들에게 공유도 하면서 책을 만들게 됐어요."
우리나라에 없던 씨앗 받는 농사 가이드북. 오도 선생님은 농사를 하면서 다양한 작물의 형태를 면밀히 기록해서 그 결과물을 책 <씨앗 받는 농사 매뉴얼>로 정리해 세상에 내놨다.
씨앗 받는 농사
"저는 처음에 토종씨앗이 중요하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농사를 짓다보니 토종만 중요한 건 아니더라고요. 토종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먹는 채소들도 토종이 되기도 해요."
토종 토마토가 있다. '토종'과 '토마토'는 같이 '토'로 시작하는 것 말고는 잘 어울리는 구석이 없다. 토마토를 보면 원 이름인 '토마토(Tomato)'가 너무 쉽게 연상이 돼버려서 '토종'과는 다른 결처럼 느껴지기 때문일까?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먹는 작물 대부분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지역에서 유입됐다. '양(洋)'으로 시작하는 작물인 '양파'와 '양배추'를 포함해 고추, 마늘도 유입 작물이다. 문익점 선생의 목화씨 이야기만 하더라도 외부의 씨앗을 들여온 사례다.
오도 선생님은 "풀무학교 내 텃밭에서도 브로콜리, 콜라비 등 프랑스 유기 종자를 구입해 채종하고 있다"며 "토종 이외의 채소더라도 많이 먹고 학생들이 좋아하는 것을 중심으로 재배한다"고 말했다.
토종의 개념은 새롭게 농업에 나타난 GMO, 터미네이터 씨앗(Terminator seed), F1 종자 등 유전자변형 농수산물과 전통적으로 전승되는 우리 씨앗을 구분하기 위해 제시됐다. 때문에 토종의 기준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어떤 곳은 최소 30년은 이 땅에서 지낸 씨앗을 기준으로 삼기도 하고 학자들의 정의에 따라 20년을 말하기도, 50년을 말하기도 한다.
토종을 정의하고 그 특성을 보존하는 것과 씨앗 받는 농사를 하는 건 미묘하게 다르다. 전자는 토종을 발굴하고 그 고유한 특성이 훼손(교잡)되지 않게 노력해야 하지만 후자는 매년 작물의 미묘한 변화를 만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오랫동안 이 땅에서 나고 자란 토종을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대인의 식생활에 맞춰 소비되는 작물을 심고 매년 씨앗을 받는 농사 역시 이 땅과 환경에 적응한 새로운 토종을 만들어가는 활동인 만큼 매우 중요하다. 농업을 농부와 땅이 계속해서 관계를 맺어가는 것으로 본다면, 토종 기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씨앗을 받고 내년에 다시 심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하다.
"풀무학교 농사는 자급이 우선이에요. 인원이 1년 동안 먹을 양을 먼저 정하고요. 나머지는 팔아서 소득으로 이어지는 계획을 세워서 밭을 분배하는 등 영농계획을 세우다 보면 토종도 심고 다른 유기 씨앗도 심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