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동 팽나무 군락지'는 옛적 레지던스가 있던 곳일지 모른다

완도를 대표하는 팽나무 군락지 이야기

등록 2024.07.19 11:17수정 2024.07.1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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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이동수단은 걸음이었다. 물론 신분이 높은 사람은 가마나 말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때 육상교통로의 요지 곳곳에 설치된 것이 역(驛)이다. 

역(驛) 다음으로는 원(院)이 있었다. 원(院)도 역과 마찬가지로 국가에서 설치해 운영했는데 역보다는 규모가 작고, 공무를 위한 관원이 출장을 가거나 양반들의 여행 시 숙박 내지 휴식처로서 존재했었다.  


1653년(효종 5년) 봄. ″제주목에 일러 겨울을 난 명마 300수를 점고(點考)하여 속히 한양으로 올리도록 하라.″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한 많은 삶을 살았던 효종은 북벌을 계획하며 제주목에서 겨울을 난 명마를 속히 올리도록 직접 하교하며 재촉하였다.  

1689년(숙종 15년) 봄.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은 강진현 성자포(오늘날의 강진읍 남포)에서 아우 송시걸(宋時杰)과 함께 제주의 유배길에 올랐다. 기록에 의하면 1689년 3월 4일 제주의 조천진에 도착하였다. 제주에 가기 전 일기가 불순하여 백련사(白蓮寺. 강진군 도암면)에 며칠 머물며 지방의 유생들에게 강론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1840년(헌종 6년) 가을. ″대역죄인 김정희에게 제주 대정현에 위리안치를 명 하노니 빈틈이 없이 행하라″ 명이 떨어지고 추사는 같은 해 9월 2일 한양을 출발하여 제주 유배길에 올랐다. 대둔사(오늘날의 대흥사)에 들려 오랜 벗 초의선사(草衣禪師)를 만난 추사는 몇 일을 머물며 국문으로 피폐해진 몸을 추스르고 가리포에서 순풍을 만나 제주에 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추사는 같은 달 27일 가리포(加里浦. 오늘날의 완도)에서 배를 타고 기약할 수 없는 멀고도 험한 유배의 길에 올랐다.

제주목의 말(馬)에 관한 글은 추상하였고, 우암과 추사에 대한 글은 기록된 것이다. 이렇듯 조선시대에도 사람들은 다양하게 움직였고 이들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숙박시설이 필요했다. 

오늘날의 원동(院洞)은 아마 원(院) 역할을 하는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이유는 위에서 세 가지를 예로 들었는데, 위의 예에서 보듯 공적인 업무를 보기 위해 제주에서 한양으로 말을 올려 보내거나, 한양에서 제주를 갈 경우 반드시는 아니어도 하급관료나 기타 사람들이 머물러 가는 곳이었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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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원동은 1522년(중종 17년) 원계에 원(院)을 설치한 것이 원동의 시초로 원래는 원포(院浦)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원포는 천혜의 항구여건을 갖춘 곳으로 지금의 군외중학교 주변이었다고 한다. 원동은 1896년 완도군이 설군되면서 육·해상 교통의 요충지로 거듭나면서 완도의 관문이 됐다. 


완도의 관문이자 교통의 요충지인 이곳 원동(院洞)에 팽나무 군락지가 있다. 지금은 잘 정비되어 있는데 팽나무와 함께 느티나무와 동백나무, 서어나무가 혼재돼 있다. 구전돼 오는 이야기로는 팽나무가 마을이 형성 될 때 심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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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이 팽나무 군락은 느티나무 1본과 팽나무 12본이 지난 1995년 '산림유전자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나무의 수령은 엑스레이 투시 결과 180년~33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흉고둘레는 느티나무의 경우 435cm, 팽나무의 경우 최소 190, 최대 270cm내외이다. 

수고는 최대 15m로 원동마을 중심부에 일렬로 서 있다. 이는 옛날에 바닷가를 따라서 방풍림으로 일렬로 심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나무 군락은 현대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마을의 갯제를 모시는 신성한 장소였다. 원동마을은 이웃 마을들과 달리 당제를 모시지 않았는데 정월 초하루날 갯제 만큼은 마을주민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모셨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에게 이 팽나무 군락은 약간의 신격화(神格化)가 되었는데 매년 음력 이월 초 하루날이면 마을의 노인들이 모여 가장 큰 팽나무의 방향을 보고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점치기도 하고 음력 3월에는 나뭇잎이 무성히 나는 것을 보고 농작물의 풍년을 점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여름철이면 마을주민들이 모이는 사랑방 구실도 톡톡히 했단다. 오늘날처럼 부유식(浮游式) 김 양식이 아닌 지주식(支柱式) 김 양식을 할 때 항목(項木)을 팽나무 밑에 야적(野積)하였는데 장마가 끝나고 여름이 시작되면 팽나무가 그늘을 만들고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추석전까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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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원동마을을 평생 지켜온 서상수(77, 군외면 원동리)씨의 말이다.

"세상에는 참 모진 것이 많은디 저그 팽나무가 그라요. 지금같이 주변 환경이 좋게 된 것이 몇 년 안 되았어요.

지금은 매립공사로 우리 마을의 옛날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매립공사를 하기 전에는 만조때먼은 팽나무 뿌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요. 그래도 그때는 팽나무가 중한지 모르고 방치되었는디 그 짜디 짠 짠물에 죽지 않고 저렇게 살어서 지금은 사람들이 전부다 팽나무를 보호할라고 그래요.

이 팽나무는 옛날 옛날에 방풍림으로 심었다고 전해옵니다. 그란디 기록이 있어야 된디 내가 젊었을 때 애그니스 태풍(1981년 9월)이 불었어요, 그때 비가 얼마나 왔는고 하먼 670mm가 넘게 왔어요, 우리마을이 쩌그 바다로 떠낼러간지 알았당께요. 당시에 마을 어촌계장을 하고 있었는디 태풍이 끝나고 마을 회관에 가본께 회관 나무궤짝에다가 넣어둔 마을서류가 전부다 물에 쟁개부렀어요.

그때 마을 서류가 한 장도 없이 싹 베레부렇어요, 그때 서류들을 보면 창호지를 묶어서 붓글씨로 기록한 것이 많앴는디 지금 생각하먼 아까 죽겄어요.

지금 팽나무가 있는 곳에 원래는 우리 허리만큼 퉁건 동백나무도 많고, 무지무지하게 큰 귀목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는디 인간의 욕심으로 다 사라져 부렀어요.

동백나무는 1980년대 고사하기 시작하듬마 다 죽어부렇고, 귀목나무는 주민들이 몰래 한그루 한그루 베어낸 것이 지금은 딱 한그루 남았어요.

팽나무도 송악이 칭칭감어서 나무가 죽게 되었어요, 송악은 겨울에도 잎이 지들않는 상록덩쿨인디 팽나무를 칭칭감어부러서 한겨울인디도 멀리서보먼 팽나무가 여름같이 파래요.

그래서 내가 의용소방대 할 때 회원들에게 나무를 살리자고 하소연반, 억지반으로 회원들을 동원하여 송악을 전부다 제거했어요, 그때 송악이 우리 팔뚝만큼 퉁괐는디 아마 그대로 놔뒀다먼 지금 저 팽나무는 한그루도 못살고 다 죽어부렀을 것이요."


원동 바로 옆 마을이 초평(草坪)과 대문(大文)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초전리(草田里)라 했다. 제주에서 육지로 실려오면서 거친 파도에 지친 말(馬)들이 상왕봉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을 마시고 초전리의 넓은 뜰에서 풀을 뜯으며 기운을 되찾아 한양으로 운송되었다고 전한다.

원동은 그 말들을 이끌고 왔을 제주목의 관리와 사공들이 다시 제주로 돌아가기 위해 재 충전하는, 요즘의 레지던스가 있던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유영인씨는 다도해해양문화연구원 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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