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열린 '통일을 위한 민족문학의 밤' 행사장에서 노태우 정권의 노동운동 탄압 사례를 거론하며 분노를 터뜨리고 있는 김남주 시인
아트앤스터디
그리고 이제 30년이 지난 오늘, 철조망이 가로막힌 분단 조국의 푸른 하늘 아래서 '조국의 별'이 된 혁명 시인 김남주를 다시 불러본다. 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이념과 정신을 온몸으로 밀고 나간 전사(戰士)요, 혁명가였던 시인 김남주! 일찍이 염무웅 선생이 '70년대의 한국문학을 김지하가 버텨냈다면 80년대를 버티고 있는 것은 김남주'라고 지적했듯이, 그는 80년대 우리 민족문학의 한 정점이었다.
그의 시가 우리 문학사의 전통 위에서 빼어난 점은 1980년대라는 한 시대를 대표하면서도 동시에 고난에 찬 우리 역사로부터 민중적․민족적 전통을 올곧게 이어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용운, 이상화, 심훈, 이육사, 윤동주 등 식민지 시대의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시인들의 유산을 소중한 것으로 간직하고 그것을 물려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 시대의 /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한 시대의 아픔을 / 온몸으로 한몸으로 껴안고 /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 중략 //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 가장 정열적으로 사랑하고 / 누구보다도 자기 시대를 /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고 / 한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 -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중에서
이 시는 김남주 시인이 녹두장군 전봉준을 추모하며 쓴 시이다. 그런데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면 늘 전봉준과 김남주 시인의 생애가 오버랩되곤 한다.
김남주는 1945년 10월 16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30여 년 동안 남의 집 머슴이었고, 어머니는 그 아버지가 머슴을 살던 주인집의 딸이었다. 훗날 시인이 된 김남주는 정직하게 자신의 가계를 시로 썼다.
그는 이름 석자도 쓸 줄 모르는 무식쟁이였다 / 그는 밭 한 뙈기 없는 남의 집 머슴이었다 / 그는 나이 서른에 애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되 / 그것은 보리 서너 말 얹어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 - '아버지' 중에서
예나 지금이나 세상으로부터 천대받고 무시당하는 농민들의 가장 큰 꿈은 자식 중 누군가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김남주가 "뺑돌이 의자에 앉아 펜대만 까딱까딱하고도 / 먹을 것 걱정 안 하고 사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김남주는 끝내 아버지가 바라던 그런 사람과는 너무도 먼 길을 선택했다. 호남의 명문이라는 광주제일고 2학년 때 오직 일류대를 가기 위한 전쟁터 같은 학교가 싫다는 이유로 덜컥 자퇴서를 내버린 것이었다. 그 후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후, 3선 개헌 반대투쟁, 교련반대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72년 대학 4학년 때. 박정희 정권이 유신헌법을 선포하자 친구 이강과 함께 전국 최초로 반유신투쟁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 배포하여, 세칭 '함성'지 사건으로 구속되어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이 사건으로 전남대에서 제적당했다.
"내가 처음 / 시라는 것을 써 본 것은 / 감옥에서였다 / 연필도 없고 / 종이도 없고 / 둘러보아 사방이 벽뿐인 / 그 벽에 하얀 벽에 / 나는 새겨 놓았다 / 이빨로 손톱을 깨물어 / 피의 문자로 새겨 놓았다" - '그 방을 나오면서' 중에서
혁명을 꿈꾸며 전사의 길을
김남주는 1974년 석방 후 해남으로 낙향하여 농사일을 거드는 한편 옥중생활에서 겪은 가혹한 고문 체험과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쓴 '진혼가'·'잿더미' 등 8편의 시를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러나 김남주는 시를 쓰는 일로 만족하지 않고 1977년 지역활동가들과 광주에서 '민중문화연구소'를 개설하여 '사회문화운동'의 구심 역할을 하다 수배되었다. 1978년 서울에서 도피 생활 중 당시 가장 강력한 반유신 지하조직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한다.
이때부터 김남주는 혁명을 꿈꾸며 전사(戰士)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다 1979년 10월 80여 명의 동지들과 체포되어 60일 동안 가혹한 고문 수사를 받고, 이듬해 1980년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후, 1988년 12월 전주교도소에서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될 때까지 9년 3개월 동안을 감옥 안에서 '전사 시인'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과 문학은 세상의 불의와 불평등을 상대로 한 치열한 싸움으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김남주에게 있어서 '싸움'의 대상은 정치적 독재와 반통일, 착취, 외세 따위였다.
시인이여 /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 싸움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 시인이여 / 누구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 압제자의 가슴에 꽂히는 / 창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 '시인이여' 중에서
김남주에게 감옥은 창작의 산실이자 투쟁의 현장이었다. 감옥은 김남주 시의 출발점이었으며 옥중시가 그의 대표시가 되었다. 그는 칫솔을 못처럼 갈아서 우유곽 안의 은박지에 시를 새겼으며, 교도관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밑씻개용으로 나오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똥색 종이에 볼펜으로 쓰기도 하고, 인쇄되지 않은 책의 페이지를 뜯어서 그 위에 시를 썼다.
김남주는 생전에 모두 510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360여 편이 옥중에서 쓰인 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쓴 시들은 당시 대학생들의 의식화 교재가 되었고, 노래패는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냈다. 암울했던 시대, 그의 시만큼 강한 무기는 없었다. 그의 시는 가장 선동적인 격문이었고 가장 투쟁적인 노래였다.
시가 물리적 힘으로 전환되는 신화를 탄생시켰다.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어느새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죽창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자유' 등은 이때 쓴 시들이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 꽃이 되자 하네 꽃이 /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 녹두꽃이 되자 하네 // 중략 //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 '노래' 중에서
어두운 밤하늘 빛나는 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