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난 덕수궁

등록 2024.07.25 08:08수정 2024.07.25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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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 여행의 꿈을 안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요란한 기차 소리가 새벽 안개를 집어삼키는가 싶더니 어느새 종착 서울역이다. 아침 시장기를 때우고 예정된 장소로 향한다. 지인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삼삼오오 모여든다.

인문학적 고궁 역사 투어이다. 궁궐 안으로 들어서자. 어찌 된 일인지 조선 초 월산대군의 묵은 향기가 난다. 덕수궁은 세조 손자 월산대군 사가(私家)였다. 월산대군은 동생 자을산대군(성종)에게 왕좌를 내주고 궐 밖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의 마른 눈물이 덕수궁 궐내 곳곳에 묻어 있는 듯하다. 속절없이 세월의 흔적을 남긴 채 조선 중기로 흘러간다.


임란의 아침! 왜군들이 파죽지세로 도성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한양 도성을 뒤로한 채 억수같이 쏟아진 새벽 비를 뚫고 평안도 정주를 지나 의주로 향한다.

왕은 천신만고 끝에 진격하는 왜군을 피할 수 있었지만, 백성들의 따가운 눈초리만은 피할 길이 없었다. 피죽바람을 맞으며 헤매던 선조는 한양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갈 곳을 잃고 만다. 모든 궁궐이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정동 월산대군 사가(私家)에 거처를 잡은 후 행궁이라 하고 후일을 도모한다.

대를 이은 광해군은 정동 행궁에서 대관식을 올린 후 경운궁이라 하고 전쟁 폐허가 된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등 재건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전후 백성들은 피죽도 먹기 힘든 판국에 하나도 아닌 몇 개의 궁궐을 축조하다니 말이 되는가. 참다못한 반대파들은 반정(反正)을 일으켜 경운궁 즉조당에서 새로운 왕위를 세운다. 그것이 바로 인조반정이다.

역사는 이유 없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했던가. 조선 후기 중전 명성황후가 피살되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 아관으로 급히 파천(播遷)하여 1년 정도 머물다가 경복궁이 아닌 이곳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형식적으로 황제국이 된 것이다.

그것도 잠시 헤이그에 보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은 왕위를 순종에게 내어주고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개칭한 후, 비운의 나날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갑자기 서거한다. 갑작스러운 고종 서거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3.1 운동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사실 고종은 덕수궁 중화문 입구 월대를 오르는 계단 답도(踏道)에 쌍용 부조를 새기는 등 황제국가로서 위엄을 보이고자 노력하지만, 한없이 역부족이었다. 아픔의 역사 속에서도 덕수궁은 멈추지 않고 흔적을 남긴다.

1945년 8월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자 한반도는 찬탁과 반탁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고종 황제가 제국의 꿈을 안고 만든 덕수궁 석조전에서 찬탁과 반탁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미소 공동위원회이다.


물론, 덕수궁에서 고종은 아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끔은 정관헌에서 커피와 서양과자를 먹으면서 대신들과 덕담을 나누기도 한다. 무엇보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것이다. 고종은 덕혜옹주가 얼마나 예뻤으면 준명당을 유치원으로 내주었을까. 덕수궁의 준명당이 우리나라 최초 유치원이 된 셈이다.

돌이켜보면 석조전 앞 최초 서양식 정원 등 덕수궁 궐 안 어느 곳도 역사의 흔적이 묻어나지 않는 곳이 없다. 조선 초부터 일제 강점기를 걸친 근현대사까지 곳곳에 묻어나 있다.

덕수궁을 뒤로하고 나오는데, 최근 잘 복원된 대한문 입구 월대에서 늠름한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채롭다. 영욕의 역사를 온몸으로 견뎌낸 이곳 덕수궁에도 시민들의 관심 속에 맑은 햇살로 묵은 아픔을 씻고 진정 영광이 오기를 기대해 보면서 어설픈 시 한 수를 읊조린다.

시간과 기억/김병모

눈물이 비처럼 쏟아진 영욕의 땅 덕수궁
과거와 현재 오늘이 혼재된 역동의 대지
시간과 기억 속으로 파고든다.

일제 강점기 화마 속에서도 버틴 회화나무
흥망성쇠를 가슴팍에 묻고 먼 산만 바라본다.
임란 후 갈 곳 잃은 선왕, 지쳐가는 육신을 달래니 흐르는 세월에 영혼마저 묻힌다.

궁궐 모퉁이에 태초부터 자리하여
때론 온몸이 찢겨 나간 전장 터로
때론 풀잎에 이는 바람에 눈물로 미소 지은 이끼들

토종 미선나무가 바다 건너 정원에서 하얀 속살로 자태를 뽐낼 무렵
함녕전 에워싼 모란
뽑아내고 뽑아내도 붉은 피 토해내며 버틴다.

조선이 다 할 무렵
영친왕 덕혜옹주 동아줄로 묶인 마음으로 바다 건너갈 무렵
귀화식물 망초 삼천리강산에 뿌려지니 저물어가는 왕조를 보는 듯하다.

역사의 풍파 속에서도 견뎌낸 학자 수(樹)
속살이 파이고 숨이 차지만
살아남은 것은 어떤 영광을 기다리는 것인가.
#덕수궁 #여행 #역사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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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대전일보나 계간 문학지에 여론 광장, 특별 기고, 기고, 역사와 문학 형식으로 20 여 편 이상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는 따뜻한 시선과 심오한 사고와 과감한 실천이 저의 사회생활 신조입니다. 더불어 전환의 시대에 도전을 마다하지 않고 즐기면서 생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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