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여운형 선생 77주기 추모제 뒤 기념촬영.(2024년 7월 20일)
변우균
빈곤으로 좌절... 하지만 또 다른 길이 다가와
하지만 열정도 빈곤 앞에선 오래 가지 못했다. 88년 근로복지공단에 취업했다. 직장 노동자의 문화를 담당하는 일이었다. 연극·문학·미술·음악을 공모해 책자를 발간하고 전시회와 공연을 기획하는 부서였지만, 8년여 직장생활은 그에겐 아픈 역사다.
"그때 결혼도 할 수 있었고, 가정을 꾸릴 재정적 기반도 마련했죠. 하지만 꿈을 실현하는 게 녹록지 않다는 걸 절감했죠. 고통을 감내하며 조금 더 참고 견딜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이 늘 남아있죠. 포기한 건 아니지만요."
공부를 더 해야 해 직장을 그만뒀지만, 그 뒤에도 그는 생계문제로 비정규 노동을 해야했다. 8년여 학교(초중고) 예술강사 생활이 그것. 연기를 희망하는 청소년에게 그 꿈을 키우는 일이어서 나름 보람도 있었다.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고.
연기 꿈을 키우는 초중고 학생들에게 그는 늘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과거 생계 때문에 연기를 포기해야 했던 자신의 좌절감이 컸기에 더욱 그랬다. 마당극을 시작하며 다짐했던 사회진보의 삶, 세상을 바꾸는 문화예술을 못다 했다는 미안함이 인터뷰 내내 묻어났다.
길은 희망이라 한 이는 작가 루쉰(단편소설 외침)이다. 원래 없었지만,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했다. '분투 없이 열리는 길은 없다'(단편소설 상서)고도 했다. 티베트인들은 사람을 '걷는 존재'로 안다. 길이 삶의 무대인 셈이다. 그러니 종국에는 삶이 길이 되는 것. 그래서 시인 장순하는 '날 따라다니느라 지쳐 누운 길'이라 했다.
그렇게 또 다른 희망, 그 길이 연극인인 변우균에게 다가온 것이다.
"학교예술강사를 하며 노조도 결성했어요. 5명이 시작했는데 1천여명으로 조합원이 늘었죠. 예술인이 무슨 노조냐며 꺼리더니, 참여자가 늘었죠. 처우가 형편없었거든요. 노조를 인정조차 안 하다 이젠 사무실과 전임자도 생겼어요. 현재는 학교비정규직노조(예술분과)로 통합됐고요."
그가 양평으로 온 건 처가의 권유 때문. 처남이 양평에서 목회(개신교 목사)했는데 용문에 분양하는 아파트를 전세금(서울)으로 구입하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고 한다. 장모와 부인이 거들어 그는 따랐다. 딸과 아들의 학교 문제도 걸림돌이 안 돼 수월했다고.
"우연히 양평에 오게 됐지만 대중교통과 자연환경이 좋아 모두가 만족했죠. 서울과는 달리 한가했고요. 요즘에는 용문(소재지)이 도시화하며 좀 복잡해졌어요. 더 한적한 양동(양평), 아니면 정선(지인이 권고해 현장답사까지)이나 거창으로 가볼까도 생각해봤죠."
양평 생활은 쏠쏠한 열매를 안겨주고 있다. 민족춤협회와 연관된 카페와 학교예술강사를 그만두고 문화예술기획에 열중하며, 가족 예술인 무대 '동심'을 기획할 수 있었다. 모녀, 부자, 자매(형제) 예술인 공연을 지난해 11월 동대문 창작마루 '광무대'에서 개최했다. 몽양추모제도 지역예술인과 논의 속에 탄생한 것이다.
부자가 기획하고 모녀가 춤·연기하는 가족공연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