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활동 숭모비이구영의 아버지(이주승)과 숙부(이조승) 창의(의병) 숭모비.
박만순
그렇다면 이구영은 어떤 인물이었나? 제천군 한수면 북노리 출신의 이구영(1920년생)은 의병의 후예이다. 그는 제천의 뼈대 있는 양반이자 부잣집 자제였다. 특히 그의 아버지 이주승과 작은아버지 이조승은 구한말 의병운동에 참여해 의병장인 이강년의 문관과 유인석의 종사관을 각각 지냈었다.
이구영은 집안 친척뻘 되는 벽초 홍명희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한학을 공부하다 상경한 그는 영창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를 다녔다. 해방 전에 월악동지회를 조직하고, 1943년도에는 독서회 사건으로 1년간 투옥되기도 했다.
이런 명문 집안의 배경과 일제강점하 독립운동 경력으로 지역에서의 그의 대중적 지지도는 대단했다. 하지만 해방 후 미군정의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속에서 그의 정치적 날개는 꺾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불출마한 제헌의회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청풍면장 출신의 류홍렬(1907년생)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됐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출신 김종무 후보 표의 3배를 획득했다. 류홍렬은 일제강점기에 금융조합 서기를 지냈던 이로 제천지역 사회운동에 특별한 이름이 나지는 않았던 인물이다.
초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은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미군정의 좌익운동 전면 탄압과 친일 경찰과 관료의 재등용, 치솟는 물가와 식량정책 실패, 분단국가 수립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을 선언했다.
그 결과 남로당은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충북 괴산의 김영규를 포함한 후보를 암살하기도 하고, 투표 당일에는 투표함을 소각하거나 선거관리위원을 암살하기도 했다. 충북 영동군 양강면 부면장이자 선거관리위원 배원규는 남로당원에 의해 1948년 5월 9일 암살됐다.
행운의 여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천 한수면 송계리 선거관리위원 석수천 테러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더군다나 석수천은 빨치산을 토벌하고 마을을 경비하는 송계리 자위대장이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한수지서장에 특채된 석수천은 승승장구했다. 송계리 지서장을 거쳐 제천군 송학지서장을 맡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빨치산이 송학지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수적 열세 속에서 지서 안에 있던 경찰은 '독 안에 든 쥐' 꼴이었다. 그런데 지서장 석수천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지서 돌담 위에 있던 타종대로 갔다. 빨치산의 침입이나 긴급상황에 대비해 종을 울리기 위한 타종대였다.
타종대에 올라간 그는 "1분대는 오전 10시 방향으로, 2분대는 오후 3시 방향으로!"라고 목청껏 외쳤다. 빨치산들은 지서 안에 경찰이 기껏해야 5~6명 있는 줄로 왔다가 당황했다. 실제 웬만한 지서에 정식 경찰은 5~6명에 불과했다. 다만 정식 경찰을 보조하기 위해 지역에서는 의용 경찰이 20~30명 정도 있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빨치산이 송학지서를 습격한 날 의용 경찰이 전부 소집된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빨치산은 급하게 후퇴했다. 하지만 그날 지서에 의용 경찰은 한 명도 없었다. 석수천 지서장이 기지를 발휘해 빨치산을 물리친 것이다.
그렇게 두 번의 위기 속에서 살아난 석수천에게 세 번째 행운의 여신이 나타났다. 한국전쟁이 터진 후 석수천은 경북 문경의 외딴 오두막에 은거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송계리에 살던 이가 그 마을로 이사와 살고 있었다. 그는 지방 좌익에게 석수천을 밀고했고, 한수면 분주소원들이 긴급출동해 석수천을 검거했다.
청주형무소 탈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