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굴진지
전영우
실제로도 이곳을 올라가면서 여러 개의 동굴을 마주할 수 있었고 이것은 산 한가운데뿐만 아니라 인근 해안가의 절벽에까지 진지동굴을 구축하였다는 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예전부터 일본은 우리나라를 식민 통치하게 된 이후 민족의 정기를 멸하기 위하여 산 이곳저곳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나온다. 이것의 진위는 불명이지만, 설령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곳 제주도에서 벌인 일본의 만행은 그것의 수준을 뛰어넘는다고 느꼈다.
그 이유에는 당시 이 진지가 구축되어 가는 시대적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제해권과 제공권을 연합국에 완전히 넘겨주며 사실상 그 국운이 다하게 될 운명을 맞았다. 하지만 일본 군부는 본인들의 패배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식민지는 물론 본토 자국민까지 모두 동원하여 항전하겠다는 "일억총옥쇄"를 부르짖으며 전쟁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것을 천명하였다. 결호 작전 역시 그 일환이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충승(沖繩)에서 벌어진 격전의 장에서 당시 살아가던 주민들의 비극적인 참상들을 보고 나면 만일 연합국이 제주도에 상륙하기 시작하면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자명하다. 다시 말해, 일본은 자국 군부의 생명을 어떻게든 연장하기 위하여 다른 무고한 민족들까지 전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민족의 정기라는 추상적인 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쇠말뚝 사건보다 우리의 실체적인 존재를 없애려 한 것이기에 직접적으로 와닿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연유로 우리 민족이 전쟁의 참상을 겪기 전에 일본이 미리 항복을 결정한 점은 매우 다행이라 생각한다.

▲ 송악산 인근의 해안가 풍경
전영우
알뜨르 비행장에서부터 송악산 해안의 일제 동굴 진지까지를 끝으로 다크 투어리즘의 코스는 모두 끝이 났다. 적잖은 시간 동안 걷고 등산하여 땀이 온몸을 적시고 매우 지쳐 갔지만 이곳에서 느낀 여러 가지 감정들은 잊히지 않았다.
만일 제주도에서 머무는 이 마지막 휴일을 이곳이 아닌 다른 평범한 관광지로 갔다면 오늘 느낀 이 무거운 깨달음은 평생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가 이곳을 고르게 된 것은 매우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제주도민들의 심정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민족주의의 기치를 논외로 하더라도 이들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일제로부터 여러 수탈을 겪어야만 했었고 광복으로 이 같은 고생도 끝이라 생각했던 것도 잠시,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휘말려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점은 한국과 일본 모두 어디가 악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정도다.
그동안 우리가 일본에 부정적인 감정을 품은 이유는 대체로 일본 그 자체가 싫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해온 그간의 만행으로 길러진 비판적인 사고에 기인한 것이었다. 여사한 맥락에서 한국 또한 일본과 마찬가지로 제주도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었다는 점에서 우리 역시 길이길이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하며 이상의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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