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 의열사. 웃자란 잡풀로 마당에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이고, 지붕 곳곳에도 풀이 자라고 있다.
서부원
사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굳이 진안과의 인연을 찾는다면, 그의 본향이 진안일 따름이다. 그는 진안 이씨 가문의 22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1년 추모사업회를 꾸려 이곳에 그의 기념관을 조성한 주체도, 다름 아닌 진안 이씨 종친회였다고 한다. 가문의 사람들이 전국에 3천 명 남짓이라고 하니, 그에 대한 후손들의 존경심을 알 만하다.
설마 이곳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렇게 방치했을 리는 없다. '성역화'라는 이름으로 추모 시설을 건립할 때만 해도, 지역의 정치인들과 지자체도 발 벗고 나섰다고 한다.
<전북일보>의 보도('순국선열의 날' 매국노 이완용 단죄한 이재명 의사기념관, 외면 속 관리 부실, 2023년 11월 16일)에 따르면, "당시 성역화사업에는 진안군도 참여했고 군비를 포함해 총사업비 34억 원이 투입, 2009년까지 의사의 본관인 진안 이씨 재실 앞 부지에 5채의 건물로 이뤄진 기념관 조성이 완료"됐다고 한다.
그런데, '성역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던 걸까. 번듯하게 시설은 갖췄으되, 정작 운영에 대한 인식은 태부족이었던 듯하다.
앞선 보도에서 <전북일보>는 이미 "당초 취지와는 달리 조성된 기념관은 지자체 차원에서의 마땅한 홍보가 없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북동부보훈지청 등 보훈 기관에서는 관리를 민간 단체인 종친회에게 무작정 떠넘기고 있어 기념관은 점차 폐허로 전락하다 현재는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는 실정"이라는 것.
매체는 이어 "실제 몇 년 전부터 기념관의 체계적인 관리 및 수리를 요청하는 군민들의 민원이 몇 건 접수됐지만 진안군은 관리 주체가 종친회라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해당 보도에서 진안군 관계자는 "기념관 조성을 추진했던 진안 이씨 종친회장 등 관계자가 대부분 세상을 떠나 마땅한 관리자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토지보상금과 관련된 예산 문제도 상존해 있어 군 차원에서 인력을 배치하고 관리에 나서기도 모호한 상황"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렇게 서로 책임을 미루며 하릴없이 세월이 흘러가고, 기념관은 나날이 흉물스럽게 퇴락해 갔다. 일부에선 또다시 세금을 들여 보수를 하느니 차라리 철거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까지 나오는 듯하다. 서글프게도, 입구의 바리케이드와 건물의 녹슨 자물쇠가 열릴 날이 도무지 올 것 같지 않다.
어쩌면 이곳을 내로라하는 추모 시설로 되살릴 유일한 해법은 이재명 의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친회와 정부 기관, 지자체를 탓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삶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성찰해 보자는 거다. 당장 이재명 의사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조차 오류투성이다.
그의 출생 연도가 사료와 유적지마다 다르다.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는 1887년에 태어났다고 적시되어 있지만, 명동성당 입구 의거지 표지석에는 1890년생으로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진안 이씨 종중의 영모재 앞에 세워진 동상에는 1888년에 태어났다고 새겨져 있다.
태어난 곳도 다르다.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는 평양에서 태어났다고 했지만, 다른 사료에는 평안도 선천 출생이라고 밝히고 있다. 출생지가 불분명해서인지, 그냥 평안도 출신이라고만 적은 사료도 여럿이다. 20년 남짓의 짧은 생애 탓인지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무척 소략하고 엉성하다.
주위엔 이재명 의사를 생소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의사라는 수식어를 빼고 말하면, 십중팔구 야당 정치인 이재명을 먼저 떠올린다. 인터넷 포털에서 검색해도 한참을 스크롤해야 만날 수 있는 처지다. 이재명이 엄혹했던 시기 갓 스물을 넘긴 조선 청년의 기백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기억될 때라야 비로소 이곳의 '성역화'가 완성될 것이다.
'독립운동가 이재명'은 모르는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