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이 심었다는 수령 460년 된 남명매
김숙귀
조식은 일찍 남명이라 자호하였다. <장자(莊子)>의 첫장에 나온다.
"북녘의 아득한 바다(北冥)에 물고기가 살고 있다. 그 이름은 곤(鯤)이라고 한다.(…) 곤은 어느날 갑자기 새로 변신하는데,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고 한다. 붕이 한 번 떨쳐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펼친 날개는 창공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에 큰 바람이 일어나면 남녘의 아득한 바다(南冥)로 날아가려고 한다."(<장자> <소요우>편)
남명은 당시 성리학자들이 '요망한 책'이라고 멀리했던 <장자>에서 호를 취한 것부터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세속의 기준이나 세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그의 분방하고 당당한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조식의 호는 이상향인 남녘 바다를 날아가는 '대붕'을 뜻하여, 이것은 모든 욕망과 권력 그리고 세속의 더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그의 삶과 '위민(爲民)과 안민(安民)의 나라 조선'을 꿈꾼 그의 철학을 온전히 담고 있다."(한정주, <호, 조선 선비의 자존심>)
'남명'을 자호로 취할만큼 조식의 포부와 행동은 거칠 것이 없었다. <덕산계정주(德山溪亭柱 )> 라는 그의 시이다.
저 천석들이 종을 보라
북채 크지 않으면 쳐도 소리 나지 않는다네
그러나 어찌 두류산만이야 하리
산은 천둥벼락이 쳐도 끄덕도 않는 것을.
남명의 국량이 이 정도였다. 천석들이 종을 칠 수 있는 큰 '북채'가 되고자 하였다. 1539년 조정에서 헌릉참봉에 임명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1544년 관찰사가 만나기를 청하여도 거절했다. 1549년에는 전생서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조정은 1555년 (명종10)에 그의 높은 학덕을 사서 단성현감을 제수했다. 이를 받을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 왕(명종)을 수렴청정하면서 온갖 전횡을 일삼는 부패한 왕대비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사직소를 올렸다. 이른바 <을묘상소>이다. 봉건군주 시대에 임금과 왕대비를 이렇게 혹독하게 비판한 상소는 흔치 않았다.
나라의 근본은 이미 망했습니다. 이미 하늘의 뜻도 떠나갔으며, 인심도 떠났습니다. 비유컨대, 이 나라는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말라버린 큰 나무와 같습니다. 언제 폭풍우가 닥쳐와 쓰러질지 모를 지경이 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내직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당파와 권세 불리기에 여념이 없고, 외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들판에서 이리가 날뛰듯 백성들을 수탈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죽이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臣)이 낮에는 자주 하늘을 우러러보며 깊이 탄식하고, 밤에는 천장을 바라보며 흐느끼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남명은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조정에서 높은 벼슬자리를 내렸으나 한 번도 받지 않았다. 벼슬을 거부한 채 은일로 학문하는 그의 명성은 전국으로 널리 알려졌다. 40대에 김해의 신어산(神魚山) 자락에 은거했다가 이어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산청의 덕산 사륜동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만년까지 살았다. 당호 '산천재'는 <주역>의 한 대목인 "강건하고 독실하여 그 빛남이 날로 새롭다"라는 의미의 서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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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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