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이 (1555년) 단성현감을 제수하자 남명이 단호하게 사직하며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국역 비.
김종신
명종의 부마 여성위 송인(宋寅)이 남명을 흠모하여 만나기를 원했다.
남명은 한 세상을 숨어서 살았는데, 영남 지방에 숨어 벼슬보기를 진흙과 같이 여겼다. 그가 서울로 올라 있을 때, 일찍이 탕춘대(蕩春臺 북쪽, 武溪洞)의 시냇가에 노닐게 되었다. 여성위 송인은, 벼슬은 비롯 부마였으나 자못 유학의 의리가 있는 것으로 자처하였는데, 남명의 풍모를 흠모하여 산 계곡에서 술 한 잔을 하고자 하여 창의문 솔 숲 사이에 장막을 쳐두고 길 옆에서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하게 서서 남명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남명이 지나가자 하인을 시켜 맞이하게 하였는데, 남명은 그가 귀한 신분에 있는 줄을 알고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취한 척 떠나면서 말했다.
"장자는 굽힐 수가 없는 것이다"
여성위가 머리를 들어 남명이 가는 것을 바라보니 아득할 뿐이었는데, 천 길의 기상을 가진 봉황과 같다고 여겼다. (주석 1)
남명의 행적은 조선 초기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보던 책을 불사르고 유랑생활을 한 매월당 김시습을 닮은 대목이 적지 않았다. 학문을 깊이 한 대학자이면서 생각은 대단히 유연하고 분방했다. 정사와 곡직을 분명히 하였으며 잔꾀를 잔재주를 부릴 줄 몰랐다.
남명이 어느 날 산천초목도 벌벌 떤다는 권세가 윤형원의 나룻배를 타게 되었다.
남명이 정암 나루에서 아이를 시켜 지나가는 배를 불러 강을 건너가려고 했다. 사공이 배를 강가에 대려고 하니 배에 타고 있던 윤원형의 종이 지체할 수 없다고 꾸짖으면서 사공을 제재했다.
이 배는 윤원형의 개인 장사를 위해 그 집의 구리와 철을 싣고 가는 장삿배였다. 운원형의 집 종이 사공에게, "윤대감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려면 지체하지 말고 빨리 가자"라고 하니, 사공이 말했다. "윤원형에게 죽으면 원귀가 되지만 조공을 괄시하면 악귀가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배를 나루에 대고 남명을 태웠다.
배에 윤원형의 구리와 철이 실려 있음을 보고 남명은, "사대부가 어찌 윤원형의 구리와 철과 같이 타고 가겠느냐?" 하면서 구리와 철을 모두 강에 던져 놓도록 했다. 그리고 배가 목적지에 닿으니, 윤원형 집 종이 사공을 묶어서 대감에게 끌고 가 이 사실을 보고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윤원형이, "네가 정말 복이 없구나. 하필 조공을 거기서 만나다니. 정말 복이 없다"라고 하고는 사공을 풀어주라고 했다. (주석 2)
주석
1> 유인몽, <어우야담>, 윤호진, 앞의 책, 99~100쪽, 재인용.
2> 조석주, <백야기문> 윤호진, 앞의 책, 100~101쪽,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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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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