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리 고인돌대개 고인돌이 평지에 있는데, 교산리 고인돌은 산에 있다. 평지에서 산으로 매장문화가 바뀌고 있는 것인지, 산에 있는 돌 산지 바로 옆에다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 돌 산지 옆에다 만들었다면, 돌을 운반할 사람이 줄어들고 있는 쇠퇴한 부족장 무덤일지도 모른다.
이병록
고인돌 유적이 청동기 시대의 지배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강화도는 몇 곳에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부근리에는 53톤의 큰 고인돌과 박물관이 있고, 교산리 고인돌은 별립산 해발 340m 북쪽 구릉에 있다. 교산리 고인돌은 밑에 있는 두 곳은 봤지만, 산 위에 있는 곳은 보지 못하고 내려왔다.
고인돌은 지배자의 권위적인 상징이므로 통상적으로 동네나 논밭인 낮은 평지에 있는 편이다. 사실 사람의 힘으로 큰 돌을 산으로 끌고 올라가기도 매우 힘들었을 텐데, 인적없는 산에다 만들었다. 혹시 평지에 고인돌을 만드는 장례문화에서 산에 매장하는 문화로 바뀌는 전환기에 만들었을까? 아니면 돌산에서 돌을 옮기는 번거로움을 없애려거나, 세력이 약화되어 산에 만들었을까?
강화도는 고려 말기 대몽골 전쟁을 계속하기 위하여 1232년에 수도를 이곳 강화도로 옮겨서 1270년에 개경으로 돌아갈 때까지 수도 역할을 하였다. 몽골과 화평에 반대하는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시작했지만, 항쟁 유적은 진도와 제주도에 많이 있다.
조선 숙종 때 48개의 돈대를 완성하고 이후 6개를 더 만들어서 5진 7보 54돈대가 완성된다. 당시에는 철통같은 방어태세를 갖춘 금성탕지(金城湯池)라고 할 수 있다. 몽골의 공격에도 버텨냈지만, 공성장비 발전에는 견딜 재간이 없었다.
프랑스와의 병인양요(1866), 미국과의 신미양요(1871) 때 이곳에서 많은 군졸이 전사했다. 서문 바로 안에 있는 연무당은 강화부 군사 훈련을 위해 1870년에 만들어진 곳이다. 이곳에서 1876년에 일본 제국과 체결된 조약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로써 우리는 '강화도조약' 혹은 '병자수호조약'이라고 부른다.
강화도는 전 시대 역사를 품고 있고, 외침을 막는 역사적 현장이다. 고려말에는 물이 막아줬으나, 조선 말에는 물을 따라서 침입한다. 한 시대의 아픔과 새 시대의 산고 고통을 모두 겪은 지정학(地政學)·역사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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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역 해군 제독
정치학 박사
덕파통일안보연구소장
전)서울시안보정책자문위원
전)합동참모본부발전연구위원
저서<관군에서 의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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