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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여행에서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곳

문학과 선비의 고장에서의 2박3일... 시인 조지훈의 지조가 더 많이 알려지길

등록 2024.08.29 11:17수정 2024.08.2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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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사진이 이메일이라면 필름 사진은 손편지 정도로 여기며 천천히 세상을 담습니다. 여정 후 느린 사진 작업은 또 한 번의 여행이 됩니다. 수평 조절 등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여행 당시의 공기와 필름의 질감을 소박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사진 하단에 사진기와 필름의 종류를 적었습니다.[기자말]
운명같은 만남이 있었던 곳, 영양

경북 영양을 처음 밟은 건 단순한 우연이었다. 업무차 정선과 삼척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위성지도를 보며 어떤 길에서 더 낭만적인 해찰을 포함할 수 있을지 가늠 중이었다. 얼핏 봐도 첩첩산중이며, 깊은 골짜기가 곳곳에 펼쳐진 곳이 눈에 들어왔다. 울진과 안동 사이의 짙푸른 산등성이들이었다.


그 이름도 강렬한 왕피천도 살짝 구경하고 이름나지 않은 작은 절경에 마음을 빼앗겨 영양군에 이르러서는 밤이 되어버렸다. 차 속에 아무 곳에서나 잠을 청할 수 있도록 간단한 이부자리가 펴져 있는지라 적당한 자리를 찾아서 쉬었는데 그곳이 공교롭게도 서석지였다. 우리나라 3대 정원이라는 그곳.

아침에 부스스 일어나 잠시 산책 삼아 눈앞의 마을을 거닐었다. 때마침 연잎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향기를 찾아가 열린 대문을 통과했더니 눈앞에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연못을 품은 고택이 펼쳐졌다. 예상치 못한 절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반적인 여행이 소개팅이라면 서석지와의 첫 대면은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이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아름다움에 기습 공격을 당해 비틀거리는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압도적인 풍경을 맞닥뜨렸다. 입암이라고도 하는 선바위 뒤에 있는 거대한 V자 절벽이었다. 흔한 팻말도 없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남이포'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언젠가 꼭 날을 잡아서 영양을 천천히 돌아보리라 다짐했던 날이었다.

a 남이포 오래된 흑백필름을 사용해서 거칠고 훼손된 질감으로 옛스러움을 연출했다.

남이포 오래된 흑백필름을 사용해서 거칠고 훼손된 질감으로 옛스러움을 연출했다. ⓒ 안사을

a 서석지 다시 찾은 그곳은 여전히 진한 연잎 향기를 품고 있었다.

서석지 다시 찾은 그곳은 여전히 진한 연잎 향기를 품고 있었다. ⓒ 안사을

a 배롱나무꽃 몸을 숙여야만 돌아다닐 수 있는 아담한 공간. 문 뒤에서 배롱나무꽃이 우리를 반겼다.

배롱나무꽃 몸을 숙여야만 돌아다닐 수 있는 아담한 공간. 문 뒤에서 배롱나무꽃이 우리를 반겼다. ⓒ 안사을


영양 여행은 '의(義)식주'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싶다. 영양 여행은 '의(義)식주'다. 약간은 유머를 더한 표현이다. 의식주 중 하나는 통상적인 의미를 벗어난다. '식'은 음식이다. 장계향이라는 인물을 주제로 하여 정갈한 한식상을 맛볼 수 있다. '주'는 고택 체험이다. '의'는 옷이 아닌 '옳을 의'자를 써봤다. 조지훈 시인의 진정한 면모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이곳을 찾기 위한 여행을 준비하면서 천천히 알아보니, 영양은 고풍스러운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에서는 단체예약을 통해 최초의 한글음식조리서를 집필한 장계향의 정신을 계승한 한식의 정수를 배울 수 있다. 더불어 '정부인상', '소부상'으로 불리는 한정식을 예약해서 맛볼 수도 있다.

주의할 점은 8인 이상의 예약자가 발생해야 이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체손님이 아닌 경우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 예약은 일주일 전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이번 여행의 시작이 좋았는지, 딱 원하는 날짜에 이미 예약이 열려 있었다. 궁금했던 정부인상은 아니었지만 소부상 메뉴도 충분히 훌륭하다.


a 소부상 재료의 식감과 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담백한 음식들

소부상 재료의 식감과 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담백한 음식들 ⓒ 안사을


또한 영양에 가면 꼭 고택체험을 해볼 것을 추천한다.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내에 있는 숙박동은 체험교육원에서 식사나 체험을 하면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몰라서 근처에 있는 병암고택을 이용했다.

숙박동은 고택이라기보다는 새로 지은 한옥이고, 고택은 말 그대로 오래된 집이기에 깔끔한 한옥체험을 원하면 숙박동으로 가면 되고 정말 고택체험을 하고 싶다면 두들마을 내에 있는 여러 고택 중 하나를 택하면 좋을 것 같다. 영양군청 홈페이지에 각 고택의 모습과 연락처가 상세하게 나와있다.

방 내부에서는 외할머니댁 장롱 냄새가 났다. 결코 퀴퀴하지만은 않은, 저절로 마음이 놓아지는 향기였다. 좁은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눕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쉬어졌다. 'ㅁ'자 구조의 고택은 집 바깥쪽과 안쪽 양방향으로 문이 나있었다. 바깥에서 편하게 출입하고, 안쪽 문을 열면 대청마루로 연결된다.

a 병암고택 내부 대청마루 날이 너무 더워 여유를 만끽하진 못했지만 아늑한 느낌이 참 좋았다.

병암고택 내부 대청마루 날이 너무 더워 여유를 만끽하진 못했지만 아늑한 느낌이 참 좋았다. ⓒ 안사을

a 방 안에서 바깥쪽 출입구를 열면 보이는 모습

방 안에서 바깥쪽 출입구를 열면 보이는 모습 ⓒ 안사을


영양에서 마주한 의(義)

조지훈 문학관은 영양 여행에서 절대 빼놓지 않아야 할 곳 중 하나이다. 문학관이 위치한 주실마을은 조지훈이 나고 자란 생가가 있는 곳이자, 400년 전부터 한양 조 씨의 집성촌이기도 한 곳이다. 문학관은 작은 건물 하나이지만 마을 전체가 조지훈문학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지훈 하면 청록파를 연상할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생각나는 것은 '승무'라는 시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 주실마을에서 뵌 조지훈은 시인으로만 표현하기엔 너무도 큰 사람이었다.

a 조지훈문학관 맞은편 조형물 조지훈문학관 맞은편 조형물

조지훈문학관 맞은편 조형물 조지훈문학관 맞은편 조형물 ⓒ 안사을

a 조지훈문학관 'ㅁ'자 구조의 문학관 건물. 아담해 보이지만 내부는 제법 넓고 알차다.

조지훈문학관 'ㅁ'자 구조의 문학관 건물. 아담해 보이지만 내부는 제법 넓고 알차다. ⓒ 안사을


나는 지금까지 조지훈에 대해 자연을 사랑한 시인 정도로만 알고 살았다. 그는 시인으로 살았던 세월보다 훨씬 길게 교육자로, 사상가로 살았던 것 같다. 1920년에 태어나 1968년에 별세하기까지 격동과 통한의 시대 속에서 기개를 잃지 않는 '마지막 선비'였다.

그의 수필 <지조론> 중 일부가 문학관 바깥에 걸려있다. 이 내용이 곧 조지훈 본인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와 같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이기도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하루아침에 함정에 빠트리고 달아나는 지조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 <지조론> 중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런 분이었다니. 여태까지 모르고 살았던 상식 없는 인생이 부끄러웠고, 이 시대에 다시 조명되어야 할 명문장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지조론 밑에 나와 있는 해설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1950년대 말기,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의 내부적 통합을 이끌어 나가야 할 중요한 시점에서, 집권 자유당은 정권 연장에만 집착하는 반민주주의적 모습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정치 현실은 극도로 혼란하고 부패가 만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정치 현실 속에서 과거의 친일파들은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뉘우침이 없이 정치 일선에 나섰고, 정치 지도자들마저 신념이나 지조 없이 시대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았다. '지조론'은 이러한 세태를 냉정한 지성으로 비판한 글이다.

영양 여행에서 한식, 한옥, 자연경관 등 정말 좋은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청록파 시인으로서가 아닌, 지조를 목숨처럼 여긴 한 인간으로서의 조지훈을 만난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경험이었다. 혹시 나처럼 그분을 그저 청록파 시인 중 한 명으로만 알고 있었던 사람이 있다면 문학관을 방문하거나 그의 삶에 대해 잠시나마 공부해 보기를 권유하고 싶다.

a 고뇌하는 임금 봉황수라는 조지훈의 산문시가 적혀있다. 처음엔 웃었지만 두고두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동상

고뇌하는 임금 봉황수라는 조지훈의 산문시가 적혀있다. 처음엔 웃었지만 두고두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동상 ⓒ 안사을


위 사진은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은 한 조형물이다. 그의 시 '봉황수'는 불법적 식민지 시대 나라를 잃은 슬픔을 낡은 고궁을 빗대여 문학적으로 역설한 것이라는 해석이 주류를 이룬다. 공원에는 이 시와 함께, 고뇌하는 임금의 모습이 동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현대의 임금은 누구인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므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결국 임금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 동상은 민생을 돌보지 않는 위정자로 인해 근심하고 있는 국민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7월 23일부터 8월 5일까지 있었던 경북, 강원 여행 중 첫 번째 장소인 영양 여행기입니다. 정선 임계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영양 #필름사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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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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