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조국해방 79주년'을 맞아 지난 8월 15일 평양 개선문광장에서 청년학생들의 야회가 열렸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6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올해 초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적대적 두 국가관계'를 주장한 이후 새로운 남북관계에 대한 분석이 계속되고 있다. 수많은 연구자와 기자들이 북한의 위기, 북한의 변화를 논한다. 그런데 뭔지 모를 불편함이 공존한다. 과연 우리가 연구하고 소식을 전달하는 대상을 '북한'이란 주어로 일반화할 수 있는 걸까?
필자는 더 이상 한반도 북반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북한'이란 주어로 단일하게 호명하고 일반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더 이상 '북한'이란 행위자는 없다
필자의 시각에서 1990년대 중반의 경제위기 이전까지, 한반도 북반부의 사회공동체는 '북한'이라는 단일 행위자로 호명될 수 있었다. 김일성은 한국 전쟁을 통해 북한지역에 판옵티콘(panopticon, 원형감옥)의 사회통제체제를 구축했다. 거의 완전한 중앙공급체제에서 구성원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살아갈 수 없었다.
여기에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뇌수로서 수령의 절대성과 당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주체사상이 이를 뒷받침했다. 1990년대의 식량난 속에 수십수백만의 주민이 아사했음에도 단 한 차례의 소요사태도 발생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90년대 경제위기는 '모든 것을 공급'하는 수령, 국가라는 신화를 무너뜨렸다. 1994년 영원한 삶을 영위할 것만 같던 수령,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북한이란 사회정치적 생명체는 돌이킬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된다. 결국 김정일 시대에 조선노동당은 '더 이상 공짜란 없다'고 선언했다. 과거 공고했던 중앙공급체계는 시장과의 동거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2009년 화폐개혁을 통해 시장(세력)에 타격을 가했지만, 결국 국가는 인민들의 신뢰를 잃고 시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국가와 시장은 공생관계를 구축했다. 이제 북한에서 시장 없는 국가란 존재할 수 없다. 시장 또한 소비재시장과 금융시장, 노동시장 등 하루가 다르게 분화하고 다양한 행위자들이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고 있다. 매일 아침 평양의 개선문 앞에 인력시장이 열린다고 하니 그 변화를 따라가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김정은이 자랑하는 평양의 고층 아파트들도 결국에는 시장(세력)으로부터 끌어모은 돈으로 지은 신기루에 가깝다.
김정은 위원장의 권력은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수령과 당, 인민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일체성'은 더 이상 북한에 존재하지 않는다. 김정은 위원장도 시장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인민의 눈치를 봐야 한다.
'북한' 내부의 다양성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더 이상 김정은 위원장의 말과 행동이 '북한'으로 호명될 수는 없다. 이제는 더 이상 '김정은'이 '북한'과 동일한 주어로 사용될 수 없고, '북한'이란 주어로 북한 정치와 사회, 경제를 일반화해 설명할 수도 없다(관련 기사:
"김정은의 '두 국가론', 성급한 판단은 위험하다" https://omn.kr/28kl0 ).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북한'의 변화를 제대로 바라보고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부족한 정보 속, 북한 연구의 위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