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4년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이 간행한 <남명문집>(왼쪽)과 1911년 간행된 정인홍의 <내암선생문집>
합천창의사
정인홍은 젊은 나이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사헌부 장령으로 재임하면서 비리가 있는 권세가들을 규탄하고, 기축옥사 때 동문인 최영령이 모함으로 처형되자 정철과 성혼을 주모자로 여겨 비판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 성주에서 왜병을 격퇴하여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되고, 남명의 문집을 간행할 때 서문에서 이황을 논한 것이 빌미가 되어 사림의 지탄을 받았다.
1608년 정인홍은 소를 올려 영의정 유영경의 참수를 청하였다가 영변으로 귀양 갔으나, 유배 중 선조가 급사하여 풀려났다. 당시 선조가 병이 깊어 세자인 광해군에게 전위(傳位)할 뜻을 유영경에게 밝혔는데, 유영경은 이를 은폐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개봉하려 하였다.
이에 정인홍은 동궁을 동요시키고 종사를 위태롭게 한 죄로 유영경을 참수해야 한다고 소를 올린 것이다.
이 일로 정인홍은 광해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 되었고, 산림에 있으면서도 조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정인홍은 귀양에서 풀려나 도성에 이르기 전에 자헌대부에 오르고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610년 좌찬성에 제수되자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면서 이언적과 이황을 비난하는 글을 올려 사람의 분노를 사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되는 계기가 되었다. 1612년 좌의정이 되었으며, 1613년 서령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이해 영창대군의 처벌을 반대하는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하였으며, 1615년 인목대비의 폐비론을 반대하고 낙향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하고, 폐모살제의 누명을 입고 참형을 당하였다. 이후 정인홍을 주축으로 한 대북파는 정계에서 몰락하였고, 정인홍은 음험하고 포악한 인물로 과장되고 격하되었으며, 조선 시대 내내 대역죄인 취급을 받았다. (주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