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신문
전남 완도군 당사도에는 우리나라 항일 역사와 관련한 명물이 많다. 그중 완도군 최남단에 있는 당사도 등대와 후박나무 군락, '완도 땅' 장수도가 항일 역사의 중요한 상징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1909년에 처음 불을 밝힌 당사도 등대는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완도와 제주해협을 오가는 배들의 안전을 책임져 왔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지역민들의 울분을 달래며 항일 투쟁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당사도 등대는 1930년대 우리나라 최초로 전파표지인 무선방향탐지기가 설치된 곳으로 무선 방위 측정 업무를 수행했다. 이는 일제의 남해 항로 장악을 위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이 지역 의병들과 주민들의 항거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특히 1909년 1월, 이준화 외 5명의 의병들이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4명을 처단하고 시설물을 파괴한 사건은 민중 항쟁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건 이후, 소안면민들과 의병들은 더욱 강력한 저항을 이어갔다.
광복 이후, 주민들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비석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항일 의병들의 투쟁을 기리는 항일전적비를 세웠다. 이로써 당사도는 항일 역사의 현장으로서의 의미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됐다. 당사도 등대는 오늘날에도 그 항일 정신을 기리며 완도군의 소중한 역사 유산으로 남아 있다.
2024년은 신안 암태도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1923년 시작된 이 운동은 조선시대부터 350여 년 동안 이어진 하의3도의 농지탈환운동 중 하나로, 일제강점기 식민수탈에 맞서 싸운 우리나라 농민운동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당시 일제의 수탈로 인해 소작료는 기존의 4할에서 8할로 폭등했다. 이에 암태도 주민들은 소작인회를 조직하고 일본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시 노동단체와 언론단체와도 연대하여 소작료 인하를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성과는 1920년대 유일한 승리로 기록된 농민운동으로 전국적인 소작쟁의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그런데 완도군 신지도에도 소작쟁의와 관련된 중요한 항일운동 기록이 존재한다. 1927년 고금도에서 고금농민조합은 강진에 거주한 지주 김후식을 상대로 약 700명의 소작인들이 소작쟁의를 벌였다. 1928년 4월에는 해남에 거주한 지주 천선재와 강진에 거주한 김충식을 상대로 다시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특히 해남 출신의 천선재는 완도군에서 약 180여 두락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 6~8할의 높은 소작료를 부과하며 천재지변으로 수확이 없는 경우에도 무리하게 소작료를 징수해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이에 소작인들은 1927년 불예동맹을 결성해 저항했고, 농민조합에서 파견된 김병규와 지종호 교섭위원들이 천선재와의 교섭을 통해 소작료를 4할로 조정하는 성과를 거뒀다.